[천년 전라도의 魂]<제1부> 의로운 땅<6> ⑤ 머지않아 국권이 회복된다-한말 의병
‘신출귀몰’ 호남 의병, 전국 최대 항쟁 펼쳤다
‘불원복기’ 휘날린 임란의병 고인후 11대 사손 고광순
국내 최초 부부의병 활약 강무경 의병장·양방매
국내 유일 한일의병사령부 유적지 ‘화순 쌍산의소’
막사터·무기제작소·유황굴 등 남아 ‘사적 485호’
2019년 03월 12일(화) 00:00

1909년 일본 군대의 '남한대토벌작전'에 끝까지 항전하다 체포된 호남 의병장들. 앞줄 왼쪽부터 송병운·오성술·이강산·모천년·강무경·이영준. 뒷줄 왼쪽부터 황장일·김원국·양진여·심남일·조규문·안규홍·김병철·강사문·나성화 의병장.

“장하도다 기삼연 / 제비 같다 전해산 / 잘 싸운다 김죽봉 / 잘도 죽인다 안담살이 / 되나 못 되나 박포대”

한말 ‘쉬쉬’ 불렀던 동요다. 여기서 김죽봉은 기삼연 부대의 선봉장 김태원을, 박포대 역시 기삼연 포대장 박도경을, 안담살이는 머슴 출신 의병장 안규홍을 일컫는다. 이런 노래도 생겨났다. “남일이 용마를 타고 / 산 밖으로 솟아오르면 / 현수는 풍운을 조화하여 /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남일은 심남일 의병장, 현수는 강무경 의병장이다. 신출귀몰 전략으로 일본 군경의 간담을 서늘케 한 호남 의병장들을 칭송하는 노래다.

1908~1909년 日 군경 추산 교전횟수·교전의병

전라도 25%·24.7%…1909년 47.2%·60% 달해

한말 의병투쟁은 을미사변(1895년)으로부터 경술국치(1910년)에 이르기까지 15년동안 펼쳐진 ‘전쟁’이었다. 일제는 의병 토벌에 러일전쟁 때보다 많은 군대를 투입했다. 그리고 당시 전라도는 최대 의병 항쟁지였다.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인 백암 박은식은 “대체로 각도의 의병을 말한다면 전라도가 가장 많았다”고 평가했다.

이는 구체적인 수치로도 입증됐다. 1908년 일본 군경의 교전회수와 교전의병수에서 전라도는 각각 25%와 24.7%를, 1909년에는 각각 47.2%와 60%를 차지했다.

1913년 전라남도 경무과(일본 경찰)에서 작성한 ‘전남폭도사’에는 전남 의병활동 시기와 거괴(대표 의병장)를 제1기(1906~1907) 최익현·고광순·기삼연을, 제2기(1908) 김태원·김율을, 제3기(1909) 전해산·심남일·안규홍을 꼽고 있다.

◇‘불원복기’ 휘날리며

지난해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나라를 구하려고 몸바친 의병들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다. 이 드라마는 본래 남아 있는 의병사진 한 장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1907년 영국 ‘데일리 메일’ 특파원 프레데릭 아서 맥켄지의 사진 한 장, 총 든 노비·제빵사·인력거꾼 등 위기의 나라를 구하러 나선 민초들이 주인공이었다.

이들은 “빼앗기면 되찾을 수 있으나 내어주면 되찾을 수 없다. 나라 팔아먹은 놈들은 목숨 걸고 안하지만, 나라 지키는 사람들은 목숨걸고 지킨다. … 이러다 결국은 죽겠지. 하지만 좋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인으로 죽는 게 훨씬 낫다.”라며 비장한 독백을 이어간다.

그리고 엔딩의 태극기, 한말 호남 의병장 녹천 고광순(1848~1907)의 ‘불원복기’를 연상시킨다. 녹천은 전투에 임할 때 태극기를 들었는데, 그 태극기에는 ‘不遠復(불원복)’이라고 쓰여 있었다. ‘멀지 않아 국권이 회복된다’는 뜻이다. 그 깃발은 현재 천안 독립기념관에 있다.

고광순은 세차례 궐기한다. 을미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송사 기우만·성재 기삼연 등과 의병을 일으켰고, 을사늑약 이후에는 면암 최익현 의병에 참여했다. 하지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 한채 의병을 해산하자 자신이 의병대장의 깃발을 내걸었다. 그것이 ‘불원복기’다.

고광순 의병부대는 능주 양회일·장성 기삼연 의병부대와 함께 광주진공작전을 펴지만 최신무기로 무장한 일본 군경에 막혀 실패했다. 게릴라전을 전개하던 그는 1907년 10월 16일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에서 일경의 기습을 받아 10여 년간 풍찬노숙하며 항일 활동을 펼쳤던 동지 13명과 함께 순절했다.

고광순은 임진왜란 의병장 의열공 고인후의 11대 사손(제사 모시는 후손)이다. 의열공의 아버지는 충열공 고경명이요, 형은 효열공 고종후다. 이들 삼부자는 임진왜란때 순절, 세상에서는 충효고가(忠孝古家)라고 일컫는다. 삼부자의 의혼은 300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고광순의 의혼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화순 쌍산의소 항일의병 유적지 대장간터 전경. <전남문화관광재단 문화재연구소 제공>
◇부자·형제 의병장, 그리고 부부 의병

한말 최대 의병 항쟁지인 전라도는 가슴 아픈 수 많은 사연을 안고 있다. 형을 따라 동생이, 아버지를 따라 아들이, 남편을 따라 아내가 나섰던 의병들의 모습은 코끝을 시리게 한다.

일제에 의해 수괴로 꼽힌 나주 출신 김태원·김율, 광주 출신 김원국·김원범, 화순 출신 양회일·양회룡은 형제 의병장이었고, 호남창의회맹소의 후군장이었던 이남규와 이정섭, 머슴 출신 안규홍 의병부대에서 활약한 임창모와 임학순, 독립의병부대를 이끈 양진여와 양상기는 부자 의병장이었다. 영암·장흥·보성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한 강무경 의병장과 부인 양방매는 우리나라 최초 부부의병이다.

광주시가 추진하는 독립의병기념관 후보지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어등산은 김태원·김율 형제의병장이 순국한 곳이다.

‘국가 안위가 경각에 달렸거늘 / 의기 남아가 어찌 앉아 죽기를 기다리겠는가 / 온 힘을 쏟아 충성을 다하는 것이 의에 마땅한 일이니 / 백성을 건지려는 뜻일 뿐 명예를 위하는 것은 아니라네 / 전쟁은 죽으려는 것, 기꺼이 웃음을 머금고 지하에 가는 것이 옳으리라’ 나주 남산시민공원에 세워진 죽봉 김태원 의병장의 친필 시비다. 그가 죽기 두 달 전 아우 율에게 써준 것이라고 한다. 광주 농성광장에는 죽봉 김태원 장군의 동상이 어등산을 향해 두 눈 부릅뜨고 서 있다.

광주 출신 양진여·양상기 부자 의병장은 두 달 간격으로 대구감옥에서 순국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교수형을 당한 전국 유일 의병장이다. 여기에 남편에게 군자금을 대기 위해 주막을 경영했던 부인 박순덕은 일제의 고춧가루 물고문에 의해 평생 두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채 고통을 겪다 사망했고, 동생 양동골은 형보다 2년 전 일본군에 체포돼 3년 유배형을 받았으니, 온 가족이 국권 회복을 위해 몸 바친 대표적 의병가문이다.

영암 출신 양방매 여사는 우리나라 첫 여성의병으로 인정받았다. 그녀는 1908년 심남일 의병부대 부장이었던 강무경 의병장과 결혼하자마자 남편을 따라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그녀의 나이 불과 18세였지만 남편과 함께 장흥과 보성, 강진, 해남 등지의 산속을 돌며 일본군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폈다. 의병활동 2년여만인 1909년 남편과 함께 일본군에 검거된 그녀는 한때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나, 나이가 어리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방면됐다. 남편은 다음해 8월 대구교도소에서 순국했다. “남편과 함께 죽지 못한 것이 한(恨)”이라던 그녀는 70여년간을 영암 산 속에서 홀로 생활하다 1986년 96세를 일기로 숨졌다. 덕유산자락 나제통문 왼쪽 입구에 의병장 강무경 동상과 사적비가 있으며, 사적비에 부부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화순 쌍산의소 항일의병 유적지 대장간터 전경. <전남문화관광재단 문화재연구소 제공>
◇국내 유일 의병근거지 ‘화순 쌍산의소’

화순 쌍산의소(雙山義所)는 우리나라 유일 항일의병사령부 유적지다. 화순군과 보성군 경계에 있는 계당산(속칭 쌍치재) 아래 증동을 중심으로 쌍봉사, 쌍봉마을 일대에 막사터, 무기제작소, 유황굴 등이 남아있다. 특히 무기제작소인 대장간터에서는 철을 생산하는 제련로, 생산된 철을 직접 가공하는 단야로, 슬러그폐기장, 수혈, 목탄저장소, 건물지, 축대 등이 발굴됐다.

이는 단순 게릴라전에 그치지 않고, 기지를 구축해 의병을 기르고 무기를 제작하는 등 체계적으로 일제에 항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항일의병 유적지가 ‘항쟁지’인 것과 달리 이 곳은 의병들이 생활하고 무기를 생산했던 근거지라는 점이 특징이다.

쌍산의소는 양회일·양회룡 형제의병장이 활약했던 곳이다. 양회일 의병장은 “충의의 백성들이여! 원수에게 잡혀 부림을 당하겠는가, 오직 죽음 뿐”이라고 맹서한 뒤 1907년 3월 9일 거병했다.

쌍산의소에는 인근 능주·보성 뿐만 아니라 전북 남원·정읍, 평남 정주에서까지 의사들이 모여들어 사기가 충천했다. 능주를 점령했지만, 광주진공작전이 실패한 뒤 쫓기다가 체포돼 세번째 옥고를 치르던 중 “너희가 천하의 의사를 다 죽일 수는 없을 것”이라며 단식투쟁을 하다 순절했다.

쌍산의소는 의병전사의 요람이었다. 참모장 양열묵은 고광순 의병부대와 합류했고, 도포장 유화국은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 군량관으로, 안찬재는 심남일부대 중군장, 임창모는 안규홍부대와 연합작전을 폈다.

한말 의병사에 빛나는 문화유적인 ‘쌍산의소’는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아 지난 2007년 8월에 사적 485호로 지정됐다.

조용익 전남문화관광재단 대표이사는 “쌍산 항일 유적은 국가사적지로 철저히 보존할 필요가 있다”며 “특히 호국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정비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정욱 기자 jwpark@kwangju.co.kr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