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이 두 번 바뀌도록 광주 마을공동체 정신을 판화에 담아온 이가 있다. 최봉익(76) 공동체 모닥 대표는 21년 동안 마을공동체 정신과 광주 공동체가 품은 정신을 목판에 새겨왔다.

최 대표는 최근 광주 22개 마을의 기원과 의미를 사자성어와 함께 판화 그림으로 만든 ‘창업 60경’을 완성했다. 그는 광주를 한 송이 꽃으로 이름 짓고, 그 꽃을 피우기 위해서 튼튼한 뿌리(풀뿌리 주민자치), 줄기(행정), 가지(전문가), 잎(주민)이 연대하고 협력할 때 비로소 광주공동체의 진면목이 드러난다고 믿고 있다. 또한 여기서 광주다운 마을공동체와 도시재생이 이뤄진다고 강조한다.

최 대표는 20여년 전부터 작품에 자신의 마을공동체 철학을 녹여넣기 시작했다.

“1990년대 말, 광주일보 지면에 실린 고지도를 본 적이 있어요. 조선시대 왕실 도서관이었던 규장각에서 보관했던 ‘전라좌도-광주’였습니다. 1872년 전라감영의 한 화원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죠. 마치 꽃이 피어나듯 개화원리로 그려진 이 지도는 한 폭의 진경산수화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광주 사람들에게 이 옛 지도가 전하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신용협동조합에서 30년 넘게 일했던 최 대표는 이때부터 광주 마을을 지도로 기록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림을 배운 적 없는 그는 50대 중반에 붓을 들었다. 최 대표가 마을의 지속성과 공동체 정신에 주목하는 이유는 또 하나 있다. 보성군 미력면이 고향인 그는 광주고로 진학하면서 궁동에서 어머니와 전세살이를 했다. 연고 없이 보금자리를 옮긴 타향살이에도 그는 이웃 덕분에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었다고 한다. 스무 차례 이상 이사하면서도 이웃의 정은 늘 그를 따라다녔다.

최 대표는 단순히 마을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마을 이름의 의미와 유래를 시민들에게 전파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의 강연에서는 용연·내지·주남마을부터 학·양림·사직동을 거쳐 치평·덕흑·우산동까지 마을 이야기가 거침 없이 나온다.

“동구 내남동 내지마을의 또 다른 이름은 ‘육판마을’이었어요. 판서가 3명 나온 이곳에서 앞으로 벼슬아치가 3명 더 나오라는 마을사람들의 기대가 담겼기 때문이죠. 마을마다 이름에 담긴 여러 소문과 설이 있는데 때로는 이런 이야기가 마을의 정체성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최 대표는 140여 년 전 만들어진 광주 고지도를 보면 광주가 나아갈 길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산과 물, 자연 질서에 담긴 뜻을 이해하고 실천해야 도시공동체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을공동체를 조성하는 과정은 한 떨기 꽃을 피우는 것과 같아요. 꽃처럼 공동체 철학과 방법을 끊임없이 광합성하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광주의 지속가능한 잎(엽록소)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광주의 역사가 반영된 광주천 주변 유림(柳林)과 경양방죽이 사라진 건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에요. ‘빨리 빨리’ 개발에 치중하기 보다는 광주의 미래를 위해 신중하게 도시를 재생하는 문화가 더 중요합니다.”

/백희준 기자 bhj@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