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박사박/ 장독에도/ 지붕에도/ 대나무에도/ 걸어가는 내 머리 위에도/ 잘 살았다/ 잘 견뎠다/ 사박사박.”(윤금순, ‘눈’)

윤금순(83) 할머니가 집 마당에 수북하게 쌓인 눈을 싸리비로 쓸어 낸다. 한참 눈을 치우던 할머니는 허리를 펴고 잠시 눈 내리는 하늘을 바라본다. 최근 개봉한 다큐 영화 ‘시인 할매’ (감독·이종은) 도입부 장면이다.

곡성군 입면 서봉리 탑동 마을은 ‘시인의 마을’이다. 마을에 들어서면 담벼락에 ‘할매(할머니) 시인’들이 직접 그린 그림과 함께 자작시들이 군데군데 붙어 있다. 시인들의 나이는 대부분 70~80대.

할머니들은 어릴 적 지독한 가난과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해 모두들 ‘까막눈’이었다. 한데 마을에 조손 가정과 한 부모 가정 아이들을 위해 ‘길 작은 도서관’을 연 김선자(49) 관장이 이들 할머니들의 평생 ‘한’을 풀어 주었다. 김 관장은 2009년에 마을 할머니들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이듬해에는 시 수업도 시작했다.

뒤늦게 한글을 깨친 할머니들은 연필을 그러쥐고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이야기를 달력 뒷면에 꾹꾹 눌러썼다. 글씨는 비뚤배뚤하고 맞춤법도 틀렸다. 하지만 힘겨운 시집살이와 가난,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한 그리움 등 인생의 희로애락을 솔직하게 시에 풀어 냈다. 모두 아홉 분의 할머니들이 쓴 시는 ‘시집살이 詩집살이’(2016년)와 ‘눈이 사뿐사뿐 오네’(2017년)라는 두 권의 시집으로 묶여 세상에 선을 보였다. 양양금(72) 할머니는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글자를 한 땀 한 땀(느리게) 쓰니까, 생각나면 쓰고 생각나면 또 쓰고 그랬다”고 털어놨다.

다큐 영화 ‘시인 할매’의 연출을 맡은 이종은 감독은 할머니들이 낸 ‘시집살이 詩집살이’를 읽고 감명을 받아 꼬박 1년간 할머니들의 생활상을 영상에 담았다. 할머니들은 ‘(세상을) 뻘로(그냥) 살았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시인 할매들의 연륜이 쌓인 시와 인생살이를 고스란히 담은 영화는 지금 관객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데, 이들의 ‘문화 사랑방’인 작은 도서관은 지붕이 낡고 담장마저 기울어 보수 공사가 절실하다.

/송기동 문화 2부장 s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