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림으로 ‘생활일기’를 쓰듯 자신의 가족을 비롯해 삶의 터전에서 만난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꾸준히, 생생하게 화폭에 담아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시골 장날 풍경 속으로 성큼 들어선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걸쭉한 이야기가 오고갈 법한 선술집 의자에 앉아 있거나, 완행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 함께 서 있는 듯도 하다.

평생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고 삶을 옥죄왔던 정신분열증과 우울증에 따른 고독과 불안, 절망과 늘 한몸이었던 그의 인생을 떠올리면 따뜻하고 평화로운 풍경과 가족, 이웃의 모습을 끊임없이 담아내는 게 그의 유일한 ‘안식처’였을지도 모르겠다.

광주시립미술관(관장 전승보)에서 열리고 있는 석현(石峴) 박은용(1944~2008)전시에 다녀왔다. 그에 대한 평전을 준비중인 석주 박종석 작가가 동행했다. 박 작가는 그를 ‘영혼이 맑은 사람’, ‘성자’라고 표현했다.

이번 전시는 ‘비운의 천재화가’, ‘고독한 농부화가’ 등으로 불렸던 그의 10주기를 맞아 기획됐다. 언제나 비주류였던 탓에 화단에서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던 그의 작품 세계와 삶을 돌아보는 대규모 기획전이다. 전시 제목은 ‘검은 고독, 푸른 영혼’으로 한국화 52점, 스케치 등 작품과 아카이브 자료를 만날 수 있다.

진도에서 태어난 박 화백은 조대부중에 입학, 미술반에서 오지호 화백을 만나고 ‘화가’의 꿈을 꾼다. 조대부고 미술반을 거쳐 서라벌예대 회화과에 입학한 그는 고향 진도에서 5년간 미술교사로 활동하다 1977년 광주로 진출,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가 두각을 나타낸 건 1983년 오랫동안 실험해 왔던 적묵법(積墨法)을 화단에 알리면서부터다. 적묵법은 먹을 중첩시킴으로써 갈필의 흔적이 겹쳐지도록 고도의 세필을 운용하는 화법이다.

‘화가 박은용’의 삶에 비해 ‘인간 박은용’의 삶은 고단했다. 1950년, 7살의 나이에 인민재판에 끌려간 아버지와 가족들이 희생되는 모습을 지켜본 그는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불안정한 정신 세계에서 떠돌았다. 가난 역시 항상 그의 발목을 잡았고, 악덕 화랑 주인을 만나 작품 대금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간첩으로 몰려 고생하기도 했다. 정신병원에 드나들고 때론 대인관계도 힘들 정도로 고통받았던 그는 심장과 관련한 지병을 앓으면서 삶을 ‘스스로’ 마감하고 만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건 무심한 듯 앞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자화상’. 함께 걸린 건,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 어디로 가는가?’라 묻는 화가의 육성이다.

전시는 모두 3기로 구성돼 있다. 1기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 말까지의 작품이다. “아침 저녁으로 만나는 풀 한포기, 밟고 가는 흙 한줌, 항상 현실에서 부딪히는 일상적인 사물들이 곧 스승이다”(1983)고 말한 그는 무등산 풍경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화폭에 담아냈다. ‘새벽의 씨 뿌리는 여인’, ‘청옥동 풍경’ 등은 점묵법으로 화면을 빽빽이 채워 넣은 수천, 수만번 붓질의 ‘공력’이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2기는 1990년대 초부터 1990년대말까지의 작품이다. 대상을 단순화시킨 화풍으로 변화한 시점으로 따사로운 정취가 화면에 가득하며 특히 개인적 상황을 그린 수묵화나 스케치들을 통해 그의 속내를 엿볼 수 있다. 3기는 2000년대 초부터 2008년까지로 한층 밝아진 색감이 눈에 띈다. 3m가 넘는 ‘남도의 가을날’(2007)은 아기 업은 엄마, 감 따는 아빠, 해학적으로 묘사된 소와 닭 등 추억을 소환하는 정겨운 풍경을 담은 작품으로 그가 ‘현대 풍속화가’로 불리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아카이브 자료 중 그가 나주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그린 스케치와 편지 등을 읽다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담배 세가치와 교환한 스케치북과 ‘천사같은’ 간호사에게 선물받은 고운 볼펜으로 “난생 처음 어린 소년과 같이 가벼운 모습으로 많은 작업을 한” 결과물들이다. ‘내 사랑하는 정숙님(아내)에게’로 시작되는 편지에는 “지금은 무엇을 하며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요. 정말 보고 싶습니다”라 적었다. 또 배동환·강연균·최쌍중 화백과 주고받은 편지와 사진 자료 등이 전시돼 있다.

‘수박 사려’ 등의 작품을 보며 그가 좀 더 오랫동안 붓을 잡았다면 그의 ‘애정 어린’ 시선으로 잡아낸, 어쩌면 사려져 버릴 지도 모를 풍경과 사람들 이야기가 우리 곁에 좀 더 풍성하게 남아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에 아쉬움이 느껴진다. 전시장에는 벼루, 붓, 화첩, 낙관 등 그의 유품들도 전시돼 있다. 그 중에 눈에 띄는 건 치열하고 힘들었던 그의 ‘마지막’을 오롯이 느끼게 해주는 듯한, 닳고 닳아버린 먹 한조각이다.

나주정신병원 입원시 아내에게 보낸 편지.

전시 개막식은 오는 20일 오후 4시 열리며 오후 2시30분부터는 장석원 미술평론가의 ‘박은용의 삶과 예술’ 강연도 열린다. 전시는 2019년 2월 10일까지 계속된다. 문의 062-613-7144.

/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