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전통과 역사를 지켜나가는 것도 교육의 중요한 일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오는 추석 명절에 손주들에게 우리 조상이 걸어온 길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려 합니다.”

광주시교육청 교육국장을 지낸 정우성(68)씨가 최근 자신의 할아버지가 남긴 한시 250편을 번역한 문집 ‘국역 암은유고’(심미안)을 펴냈다. ‘암은(巖隱)’은 정씨 할아버지 정난수씨의 호이다. 210쪽이 넘는 분량으로 한국고전번역원 감수위원인 김재희씨의 번역 도움을 받았다.

정씨가 문집을 내기로 결심한 것은 부친이 세상을 떠난 4년 전의 일이다. 상을 치른 뒤 정씨는 집안을 정리하던 중 할아버지의 시집들을 발견했다.

영광군 불갑면 응봉리 봉암마을에서 훈장을 지냈던 할아버지는 정씨의 어릴 적 기억으로 “어렵고 무서운 분”으로 남아 있었다. 그는 말로만 들었던 할아버지의 문학적 성취를 후손에게도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게 되면서 출판 작업에 들어갔다. 갈수록 젊은 세대가 한문을 멀리하기 때문에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마침 43년 6개월 간의 교직생활을 마무리하고 퇴임한 터라 출판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책은 암은 선생이 69세 때 쓴 47편의 시를 엮은 만집 ‘설니홍조’와 시축 등으로 구성돼있다.‘눈 위에 기러기 발자국이 눈이 녹으면 없어진다’는 내용을 담아 인생의 자취가 흔적이 없음을 노래했다. 봉암마을에 암은의 기적비를 세우면서 주변인들이 쓴 글도 실려있다.

정씨는 “후대에 할아버지에 대해 설명할 만한 ‘교재’가 생긴 것 같아 뿌듯하다”며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렵게 공부하면서도 250편이 넘는 시를 쓴 할아버지의 열정과 노력을 자손들이 알아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정씨는 이번 출판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인생 2막을 설계했다. 그는 동구 동명동의 백천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있다. 그것으로도 배움이 모자라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공부하고 있다. 그는 “한문은 알면 알수록 더 어려운 깊이 있는 학문”이라며 “공부를 계속해서 언젠가는 할아버지처럼 한시를 써보고 싶다”고 말했다.

/글·사진=백희준 기자 bhj@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