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는 1980년대 어린이 유괴 살인 사건을 모델로 하고 있다. 소설은 아들이 살해되어 분노하던 어머니가 교회를 찾아가 마음의 위안을 얻고 범인을 용서하려 하지만, 사형 선고까지 받은 범인이 먼저 신앙적 구원 속에 마음이 평화로워져 있음에 절망한다는 이야기다.

소설은 12·12와 5·18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씨가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회 정화와 국가 질서를 강조함으로써 근본적인 폭력이 은폐되는 현상을 비판하고 있다. 독자들이 소설 속 가해자의 얼굴에 누구를 대입시키는가를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지난달 광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에서는 피고인 전두환 씨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그는 5·18 당시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해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다가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됐지만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아 5년째 투병 중이라는 것이 불출석 이유였다. 사법적 단죄를 피하기 위해 ‘셀프 면죄부’를 들고 나온 그 수법이 치졸하다.

궐석 재판에서 판사는 “2013년부터 알츠하이머를 앓았다는데 회고록은 2017년 4월에 발매됐다. 모순이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그는 스스로 주장하는 치매 투병 기간 중 고등학교 동문 체육 대회에 참석하고 자택에서 신년회를 갖는 등 어느 전직 대통령보다 정열적으로 활동했다. 그래서 그의 선택적 기억은 기묘하기까지 하다.

‘벌레 이야기’ 속 희생자 엄마는 “내가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먼저 그를 용서할 수 있느냐”고 절규한다. ‘벌레’가 아닌 ‘인간’이라면 때로는 용서가 가장 무거운 벌이 될 수도 있다. 양심의 빚을 지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아공의 만델라는 진실과 화해라는 이름의 법정에서 백인 인종 차별 주의자들에게 ‘용서’라는 형벌을 선고했다. “진실을 고백하고 참회하라. 그러면 용서하겠다.”

전두환 씨는 알츠하이머병에 기대서라도 기억을 지우고 싶겠지만, 피해자들의 기억은 38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다. 재판은 10월 1일 다시 열린다.

/유제관 편집1부장·부국장 jk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