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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재의 세상만사] ‘바람 앞의 촛불’ 공기업 수장들

2018. 08.03. 00:00:00

옛날에 술을 파는 사람이 있었다. 정직하고 공손한 데다 좋은 술을 만드는 재주도 있었지만 술이 시어지도록 팔리지 않았다. 나중에 이유를 알아보니 집안에 사나운 개가 있기 때문이었다. ‘사나운 개가 있으면 술이 시어진다’는 구맹주산(狗猛酒酸) 혹은 맹구지환(猛狗之患)의 고사(故事)다.
요즘 날씨 참 덥다. 푹푹 찐다. 마치 찜통 속에 들어온 듯하다. 대지는 용광로처럼 펄펄 끓는다. 가마솥이라 해도 이리 뜨거울까. 과장이라고만 느껴졌던 더위에 관한 그 온갖 표현들, 올해는 온몸으로 실감한다.
“날도 더운데 양복저고리는 벗고 편하게 회의를 하시죠.” 얼마 전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이용섭 광주시장이 무더운 날씨를 감안해 기관장들에게 건넨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기관장들은 주저주저했다. 물론 용감하게(?) 옷을 벗은 이도 있었다. 편하게 회의를 하자는 시장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몇몇 사람은 더위를 참아 가며 끝내 옷을 벗지 않았다. 왜 이들은 옷을 벗지 못했을까.

자리 200개 있어도 모자라

우리말 중에 ‘옷을 벗다’라는 표현은 단지 ‘걸친 옷을 벗는다’는 뜻만이 아니라 ‘관직에서 물러나다’라는 뜻도 있기 때문이다. 새로 바뀐 시장이 언제 어떤 신호를 보내올지 모르는 상황이니 그럴 만했다.
“우리는 ‘옷을 벗는다’는 말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날 회의에 참석한 어느 기관장의 말이, ‘을’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처지를 대변해 주는 듯했다.
민선 7기가 출범한 뒤 민선 6기에서 임명된 기관장에 대한 임기 보장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현행 지방 공기업 및 산하 기관 등의 대표자들은 법적으로 임기가 보장되어 있다. 하지만 임명권을 갖고 있는 지자체장이 바뀔 때마다 매번 교체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선거가 끝나고 새로운 단체장이 취임하면 이들은 늘 ‘바람 앞의 촛불’ 신세가 되고 만다.
“벗으라면 벗겠어요. 당신이 벗으라시면.” 사퇴 압박을 받은 뒤 이렇게 담대하게 나올 기관장은 많지 않다. 지자체장의 교체 의도가 확인되면 대부분은 끝까지 버티지 못한다. 버티려 해도 온갖 압력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감사다. “감사 들어갑니다.” 이 한마디는 곧 지자체장의 기관장 교체 의도를 간접적으로 전해 주는 말이다. 감사에도 불구하고 내 몸 깨끗하다면 끝까지 버틸 수 있지 않겠느냐고? 어림없는 말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게 감사 전문가들의 얘기이니까.
광주시 산하 기관으로는 공사·공단과 출자·출연기관 등 모두 24곳이 있다. 이 가운데 도시공사, 테크노파크, 과학기술진흥원, 그린카진흥원 등 네 곳의 수장이 현재 공석이다. 또 정보문화산업진흥원(11월)과 광주영어방송(9월) 등 두 곳은 올해 안에 임기가 끝난다.
문제는 행여나 하며 기다리고 있는 대기자들이 무척 많다는 점이다. 다 알다시피 지난 선거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용섭 선거 캠프에 몰렸었다. 이들은 캠프 해단식에서 ‘어떤 보상을 바라지 않겠다’고 한목소리로 결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속마음도 이와 같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시중에서는 이들 선거를 도운 사람을 일일이 챙기자면 최소 200개의 자리가 필요하다는 얘기까지 나돈다.
그렇다면 인사권을 쥐고 있는 이 시장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앞서 언급한 기관장 회의로 돌아가 보자. “100m를 10초 이내로 달린다 하더라도 왼쪽으로 가야 하는데 자꾸 오른쪽으로 가면 잘 달리지 못하는 것이다.” 시장은 자신의 철학과 가치가 같지 않으면 함께 갈 수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철학과 가치가 다르면 같이 갈 수 없다’는 말.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듯하다. 아, 나라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들었던 말이 바로 그 말이다. 물론 한 나라라면 그럴 수 있겠다. 좌파도 있고 우파도 있는데, 나와 다른 파와 같이 가는 것은 힘들 테니까.
하지만 광주라는 도시에서 기관장이 누가 되든, 철학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고 가치가 다르면 얼마나 다를까. 더군다나 ‘정신적으로는 정의롭고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운 광주’라는 이 시장의 그 멋진 철학에 토를 달 사람이 그 누가 있을까. 결국 자신의 어떤 속마음을 그처럼 에둘러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뭐 짐작하고 말 것도 없었으니, 이 시장은 곧바로 자신의 속내를 구체적으로 털어놓았다. “압도적 지지를 받아 선출된 임면권자는 시민 권익과 광주의 발전에 적합하지 못한 기관장을 바꿀 수 있는 권한을 시민들로부터 위임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앞서 이 시장은 ‘올 하반기에 임기가 만료되는 기관장은 잔여 임기를 보장하겠다’고 했다. 다만 내년 이후 임기가 만료되는 기관장은 경영 성과나 온갖 평가 등을 종합적으로 참고해 임기 보장 여부를 판단하겠다고 했다. 이는 일단 산하 공공기관 인사에 대한 방침을 명확히 제시해 혼선을 줄였다는 평을 받는다.

선거 빚이야 갚지 않아도

그럼에도 노파심에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경영 성과가 나쁠 경우 교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자기 사람들로 채우기 위해 인위적으로 물갈이를 하려 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이들 기관장 중 상당수는 온갖 신상까지 다 털리면서(?) 청문회를 통과한 이들 아닌가. 따라서 기관장의 능력과 성과는 제쳐둔 채 시장의 입맛에 맞도록 무조건 교체하려 드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전임 시장이 임명했다거나 정치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바꾸고, 시장과의 친분이나 선거 기여도 등에 따라 기관장 감투를 마치 선물처럼 주는 것은 또 다른 적폐일 뿐이다.
물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측근들의 요구가 있을 수 있다. 사실 이러한 유혹은 시장으로서도 물리치기가 쉽지는 않다. 선거에서 신세 진 이들을 챙겨 주고 싶은 마음 또한 인지상정(人之常情)일 테니까.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선거에서 진 빚은 갚지 않아도 된다. 그 빚 갚으려다 오히려 시정을 망칠 수 있다. 인사가 만사(萬事)가 아닌 망사(亡事) 되는 걸 우리는 그동안 수없이 보아 왔다.
측근의 말도 과감히 물리칠 수 있는 담대한 용기가 있어야 한다. 어느 조직에나 맹구(猛狗)들이 있기 마련인데 혹시 아는가, 믿었던 측근이 ‘사나운 개’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주변에 갑자기 완장 차고 설쳐대는 이들이 없는지 늘 살피고 살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 민선7기에서만큼은, 정실·보은·측근·낙하산 인사의 오랜 관행(?)을 과감히 깨뜨려 주었으면 하는 것인데, -‘혹시나’가 ‘역시나’ 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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