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남녀가 포도를 먹는다. 포도씨앗을 뱉지 않고 입안에 모아두었다가 서로의 얼굴에 포도씨앗을 뱉으며 행복하게 까르르 웃는 모습을 본 소년이 엄마에게 흉내 내어 포도씨앗을 뱉았다가 등짝을 실컷 두들겨 맞는다. 진정한 사랑의 유희를 이해받지 못한 소년의 슬픈 이야기는 작가 임철우의 소설 ‘포도씨앗의 사랑’의 중요한 모티브였다.







포도를 먹거나 포도그림을 볼 때마다 ‘포도씨앗의 사랑’이 떠오르곤 한다. 요즘에야 씨 없는 거봉포도, 청포도, 적포도가 우리 입맛을 지배하고 있지만 나에게 포도는 알 굵은 송이가 정정당당하게 붙어있고 당도 높은 캠벨포도가 최고다. 포도씨앗이 위를 자극해서 운동이 되게 함으로 건강에 좋다는 믿거나말거나 한 속설을 믿은 까닭에 포도씨앗을 뱉지 않고 언제나 포도알과 함께 삼키지만 간혹 포도씨앗을 입 안 가득 모아두었다가 허공에 뱉으면서 풋! 하고 웃음 짓는다. 아름답고 순수한 포도씨앗의 사랑을 흉내 내고 싶은 소년을 나도 따라하고 싶은 것이리라.

직헌 허달재 작가(1952~ )의 작품 ‘포도’(2018년 작)는 전통적인 묵포도도의 근엄함 보다 추상회화로 보이는 세련된 화면이 위트 있게 다가온다. 화면 가득 먹의 농담의 변화로 포도알과 이파리가 섬세한 붓질로 묘사되고 위에서 아래로 뻗어 내려가는 포도 넝쿨가지는 지그재그로 박자를 맞춘 듯 경쾌하다. 화선지에 우리 전통 북종화에서처럼 예닐곱 차례의 얇은 채색을 한 후에 수묵으로 그림을 그려 전체적인 정취나 분위기가 요즘 감각을 리드할 만큼 현대적이어서 문인화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마음이 그림을 닮고 그림이 마음을 닮는 사의적인 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직헌은 남종화의 대가 의재 허백련(1896~1977)의 손자이자 제자로 의재가 추구했던 동양적 정신과 전통을 이어받되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예술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찬탄을 받고 있다.

<광주비엔날레정책기획실장·미술사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