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두려우랴, 빗속에서도 춤출 수 있다면
2018년 07월 23일(월) 00:00 가가
[문요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3년 전 안데스 트레킹을 위해 페루 와라즈에 갔을 때의 일이다. 도착하자마자 현지 여행사를 통해 3박 4일의 산타크루즈 트레킹을 신청했다. 그리고 4일 뒤 새벽, 10여 명의 다국적 트레커들과 함께 여정을 시작했다. 온 세상이 빛나 보일 만큼 정말 화창한 날씨였다. 다들 신이 나서 산에 올랐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오후가 되면서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이내 폭우가 쏟아졌다. 앞이 안 보일 정도였다. 부실한 우비는 종잇장에 불과했다.
고도가 높아지자 어느덧 비는 눈으로 바뀌었다. 스틱을 쥔 손이 너무 시렸다. 고생 끝에 고점인 4750m의 푼타 유니온에 올라섰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고봉의 설산은 고사하고 앞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추위였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렸다. 그냥 트레킹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와라즈로 돌아가고 싶었다. 계속 후회의 감정이 밀려왔다. “빨리 출발할 걸!” 와라즈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 출발하는 일정이 있었는데 나는 여유롭게 움직이고 싶어 4일 뒤에 출발하는 일정을 선택했던 것이다. 날씨가 이렇게 되니 그 선택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제어되지 않는 후회는 곧 화로 바뀌었다. 나는 난폭하게 걸었다. 한참을 걸어 첫날 야영지에 도착했다. 여행사 직원이 미리 텐트를 쳐 놓았지만 폭우에 멀쩡한 게 없었다. 계속 쏟아지는 비로 인해 모닥불을 피울 수도 없었다. 너무 심란했다. 그나마 유일한 위안은 서서 비를 피할 수 있는 식당용 대형 텐트였다. 그 텐트 안에 서서 비를 피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따뜻한 코카 차를 마셔 보았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낮은 신음 소리와 이 부딪히는 소리가 절로 나니 더욱 처량해졌다. 한참을 떨고 있으니 고산병에 힘들어 하던 이스라엘 커플이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그 커플이 텐트 안으로 들어오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때였다. 영국인 친구 둘이 식기를 두드리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추워서였을까? 노래와 춤은 계속 이어졌다. 비좁은 식당 텐트는 순식간에 세계 각국에서 모인 트레커들의 춤 경연장으로 변모했다. 원 안에 한 사람이 들어가면 모두 그의 몸짓을 따라서 춤을 췄다. 마지막 순서는 아르헨티나 친구였다. 그는 갑자기 빗속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 빗속에서 몸을 흔들어 댔다. 우리도 달려가 그를 에워쌌다. 빗속의 어지러운 군무는 계속되었다.
이어 그가 이상한 동작을 하면서 주문을 외웠다. 비가 그치고 태양신이 나타나 달라는 의미라고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놀랍게도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그리고 이내 해가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구름에 가려 있던 웅장한 설산들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놀랐다. 우리는 원시 부족처럼 ‘꺅! 꺅!’ 환호성을 지르고 서로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악천후는 축제로 바뀌었다. 와라즈에 도착한 다음 날 떠났더라면, 악천후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놀라운 장면이었다. 그날 밤, 젖은 텐트를 닦아 내고 누웠다. 온갖 짜증을 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면서 한편으로는 일종의 깨달음 같은 게 찾아왔다. 악천후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여행은 즐거울 수 있으며, 힘든 문제에 부딪히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늘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그것은 여행이 가르쳐 준 삶의 기술이었다. 여행은 내게 비가 그칠 때까지 마냥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 빗속에서 춤을 출 수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왜 뜬금없이 오늘은 3년 전 이야기를 꺼낸 것일까? 얼마 전 읽은 소동파의 ‘정풍파’(定風波)라는 시 때문이었다.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 소동파는 정쟁에 자꾸 휘말려 오랜 귀양살이를 했다. 그러나 그는 귀양을 추방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여행처럼 즐겼다.
그가 한번은 황주 근처 사호로 가던 중에 비를 만난 일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비에 낭패스러워 했으나 오직 그만은 시를 읊조리며 빗속을 천천히 거닐었다. 얼마 있지 않아 비가 멈추자 그는 이 시를 지었다. 그의 시를 읽는 순간, 나는 다시 3년 전 빗속에서 춤추던 시공간으로 돌아갔다. 무엇이 두려우랴. 빗속에서 춤출 수 있다면!
“숲을 뚫고 나뭇잎 두드리는 빗소리 무서워 마오/ 시를 읊으며 천천히 거니는 길 무슨 방해 될까/ 대나무 지팡이에 짚신 신고 걷는 게 말 타는 것보다 좋으니/ 무엇이 두려우랴, 이슬비 속에 도롱이 쓰고 한평생 걷게 된다 한들”(중략)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제어되지 않는 후회는 곧 화로 바뀌었다. 나는 난폭하게 걸었다. 한참을 걸어 첫날 야영지에 도착했다. 여행사 직원이 미리 텐트를 쳐 놓았지만 폭우에 멀쩡한 게 없었다. 계속 쏟아지는 비로 인해 모닥불을 피울 수도 없었다. 너무 심란했다. 그나마 유일한 위안은 서서 비를 피할 수 있는 식당용 대형 텐트였다. 그 텐트 안에 서서 비를 피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따뜻한 코카 차를 마셔 보았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낮은 신음 소리와 이 부딪히는 소리가 절로 나니 더욱 처량해졌다. 한참을 떨고 있으니 고산병에 힘들어 하던 이스라엘 커플이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그 커플이 텐트 안으로 들어오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악천후는 축제로 바뀌었다. 와라즈에 도착한 다음 날 떠났더라면, 악천후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놀라운 장면이었다. 그날 밤, 젖은 텐트를 닦아 내고 누웠다. 온갖 짜증을 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면서 한편으로는 일종의 깨달음 같은 게 찾아왔다. 악천후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여행은 즐거울 수 있으며, 힘든 문제에 부딪히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늘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그것은 여행이 가르쳐 준 삶의 기술이었다. 여행은 내게 비가 그칠 때까지 마냥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 빗속에서 춤을 출 수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왜 뜬금없이 오늘은 3년 전 이야기를 꺼낸 것일까? 얼마 전 읽은 소동파의 ‘정풍파’(定風波)라는 시 때문이었다.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 소동파는 정쟁에 자꾸 휘말려 오랜 귀양살이를 했다. 그러나 그는 귀양을 추방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여행처럼 즐겼다.
그가 한번은 황주 근처 사호로 가던 중에 비를 만난 일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비에 낭패스러워 했으나 오직 그만은 시를 읊조리며 빗속을 천천히 거닐었다. 얼마 있지 않아 비가 멈추자 그는 이 시를 지었다. 그의 시를 읽는 순간, 나는 다시 3년 전 빗속에서 춤추던 시공간으로 돌아갔다. 무엇이 두려우랴. 빗속에서 춤출 수 있다면!
“숲을 뚫고 나뭇잎 두드리는 빗소리 무서워 마오/ 시를 읊으며 천천히 거니는 길 무슨 방해 될까/ 대나무 지팡이에 짚신 신고 걷는 게 말 타는 것보다 좋으니/ 무엇이 두려우랴, 이슬비 속에 도롱이 쓰고 한평생 걷게 된다 한들”(중략)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