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8일 새벽에 군인들이 고려대학교 기숙사를 세 겹으로 에워쌌다. 학생들이 회의실에 모여 시위할 계획을 의논하며 흩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만 자라고 나는 전원을 껐다. 불이 꺼지고 얼마 안 되어 군인들이 들어왔다. 군인들에게 문을 열어주면서 518명의 학생을 살릴 수 있다면 나는 죽어도 좋다고 다짐하였다. 그러나 혼자서 군인들과 상대하며 지새운 그 막막한 밤을 겪은 이후로 나는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나의 문학적 사고에 대하여 반성하게 되었고 자의적이고 현학적인 문학 비평들에 실망할 때마다 통계학 책을 찾아 읽게 되었다.”(본문 중에서)



대체로 문학 평론은 텍스트에 집중해 필자의 문학적 견해를 담아내는 게 보편적이다. 다분히 주관적이고 현학적으로 흐를 소지가 있다. 허학(虛學)에서 벗어나 실학(實學)적인 인문학 길을 제시한 책이 눈에 띄는 이유다.

문학평론을 넘어 문화와 학문의 여러 영역을 아울러 통찰의 힘을 보여온 김인환 고려대 명예교수가 새 에세이 모음집 ‘김인환 과학과 문학’(수류산방·사진)을 펴냈다. 총 8편의 에세이와 1편의 영문 에세이는 과학과 수학, 문화와 예술을 오가며 세계의 폭넓은 문제를 건드린다.

책은 “문학도의 자기 반성”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됐다. 즉 “객관성과 엄밀성은 놓친 자의적이고 현학적인 문학비평”이 “지적 사기”라는 냉정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한국 대학 복구론’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저자는 학문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우리 대학 교육에 대한 깊은 반성을 바탕으로 한다.

김 교수는 한국 교육의 병폐는 문제풀이 중심으로 수행되는 데 있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가르치는 것은 최소한의 바탕 관념으로 한정하고 모든 작업을 학습자 자신이 스스로 하게 하는 과학과 예술의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은 우리 사회의 시급한 과제”라는 것이다.

저자의 지적 사유는 학문 연구와 근대 경험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영화와 인터넷 게임, 건축과 시, 정신분석학과 민주주의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다. 그 핵심에는 “실재는 무한하고 개념은 유한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한다면 문학과 과학이 서로 대화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인식이 놓여 있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