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돌아가는 것을 살펴보면 고사성어 또는 격언·금언 등으로 불리며 사람들로부터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 온 명언·명구들이 지금도 현실에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잘 알려진 것들 가운데는 1~2천 년의 역사를 가진 경우도 적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 명언·명구의 끈질긴 생명력은 놀라울 정도다.

하지만 장구한 지구의 역사에서 몇 천년은 사람 신경망의 연결 구조와 사고의 방식을 결정하는 유전자 정보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일 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들 명언·명구는 ‘인간’이라는 종이 유지되는 한 인간사의 깊숙한 내면과 의식 구조를 단숨에 들여다보고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유용한 도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얼마 전 유명을 달리 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미리 써 놓은 묘비명에는 ‘무항산이무항심’(無恒産而無恒心)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지금으로부터 2300여 년 전 중국 전국 시대 제나라의 왕이 ‘정치가 무엇인가’라고 묻자 맹자가 한 답변이다. 일반 국민이 가난에 찌들게 되면 방탕과 괴벽, 부정, 탈선과 같은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는 게 요지다. 맹자는 특히 “(가난해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국민이 죄를 범한 후에야 법으로 처벌받게 하는 것은 국가가 국민을 그물질하는 것과 같다”며 국가의 책임까지 거론하고 나선다.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보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한 맹자조차도 ‘가난 앞에서는 사람이 타고난 선한 마음도 흔들릴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 셈이다. 결국 ‘국민이 배가 부르지 않으면 죄를 범하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군사 정권 시절엔 국민의 대척점에 섰지만 DJP연합 등을 통해 대한민국 민주화에 기여하며 정권의 2인자로 살아왔던 JP가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긴 ‘평생의 심득(心得)’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바람을 부르고 구름을 일으키며 살아 온 자신의 92년 삶을 되돌아보며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은 결국 경제’라고 파악한 것이다. 그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JP의 통찰(?)은 지금도 우리 정치권이 되새겨야 할 진리가 아닐까 한다.

/홍행기 정치부장 redpla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