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는 내 침상에 어머님께서 다녀가셨다. 영락없는 생시다. 그래서일까 오늘은 유독 소천하신 어머님 생각이 자꾸 난다. 어머님 생각을 하다 보니 불효했던 일과 고향 생각이 절로 난다. 사람으로서 평생 잊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면 ‘어머니’와 ‘고향’이라고 했던가? 오늘 따라 옛날 어린 시절 고향에서 자랄 때 지나온 이야기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나의 고향은 땅끝 고을 남창이다. 음력 정월 대보름 때에는 300~400호가 넘는 온 마을이 두 편으로 나뉘어 줄다리기(고싸움 놀이)를 한다. 오월 초 닷새 날 단오절에는 수리취떡을 해 먹으면서 면 주민들이 총 동원돼 명절 축제가 열렸다. 난장이 열리고 바다에서는 배 노젓기 대회가, 마을 운동장에서는 리 대항 축구대회, 뒷동산 큰 팽나무에 걸린 그네 아래서는 동네 여인들의 그네뛰기 대회가 참으로 장관이었던 것 같다. 여인들이 그네를 뛸 때 길게 내려 딴 머리가 앞으로 차고 오를 때면 뒤로 쭉 내려진 머리에 달린 댕기가 훨훨 날았다. 밑에서 구경하던 저희들은 누가 먼저 시작할 것도 없이 부르던 노래가 ‘오빠 생각’이다. ‘말을 타고 서울 간 오빠가 비단댕기 사가지고 오신다더니’의 비단 댕기가 시대가 변하면서 ‘비단 구두’로 바뀌긴 했지만….

80여 년 전 여자 아이들은 거의 머리를 땋고 그 끝에 끈이나 헝겊을 드리는 댕기를 하고 다녔다. 가끔 아이들에게 댕기를 아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모른다고 한다. 지금은 댕기라는 이름도 모르는 세대가 됐지만 우리들 어려선 큰 관심거리였다. 그때는 어린이가 아니더라도 여자는 머리를 풀고 다니지 못했다. 부모님들이 돌아가실 때에만 애통하는 뜻에서 머리를 풀어보는 것이지 여자 아이들은 돌도 되기 전부터 머리카락이 조금 자라면 앞머리를 반듯반듯 땋아서 굵은 실이나 헝겊으로 드리워 마무리 지어 놓는 게 어머니들의 솜씨였다.

조금 더 자라면 그 총총 머리를 합쳐서 뒷머리와 함께 땋고 댕기를 드리워 마무리 지어 놓는다. 할머니가 계신 집에선 할머니께서 도와주시니까 좀 쉬워도 그렇지 않는 집에선 날마다 아침에 머리 빗겨주는 것이 큰일이었다. 저희 집 경우에는 제 여동생이 셋에 그 때만해도 대가족 제도라 작은댁도 함께 살았다. 자그마치 식구가 열다섯, 작은 댁 사촌 여동생이 다섯이었으니 아침마다 학교를 보내시려는 어머님, 숙모님 고생이 어쨌을까. 이제야 조금 가늠해 보니 우리가 참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 왔을까 믿기지가 않는다. 댕기로 자기의 형편을 과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으면 흰 댕기를 드리우고, 삼 년이 지나야 검은 복 댕기 석 달을 드리우고 석 달이 지나면 붉은 댕기를 드리우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설날 비단 댕기 하나 드리우면 추석이나 되어야 또 하나 드리우는 건데 요놈을 날마다 만지고 매고 하니까 몇 달이 안가서 해어지는 것도 보았다. 저희 집에서는 어머니께서 명주와 산동주에 물감을 들여 드리었는데 웬만한 집 아이들은 너덜너덜해진 걸 드리우고 다니었으니 그 시절 댕기는 참 중요한 것이었다.

특히 설날 어머니께서 드리워 주시는 내 동생들 호사 댕기는 오복수 좋은 댕기였다. 길이로 반 되는 곳을 정점으로 두 자락 안으로 접고, 느려지는 두 자락에다 “수복강령, 부귀다남” 등 좋은 글귀를 한문으로 금박아 놓고 그 가장자리에 완전 좋은 무늬를 두른다. 자락이 맞닿는 곳엔 은으로 나비 석광을 큼직하게 만들어 칠보로 오색을 영롱하게 아로새겨 달아 놓으면 요새 말로 근사하다. 석광이 달린 뒷면에 부드러운 비단 종댕기를 달아 머리 마무리를 하는 것이다. 어려서 머리가 작으니까 호사 댕기로 치레하는 거다. 설날이나 경사스러운 날만 드리우고 동생이나 조카들에게 대물림하는 것이 호사 댕기다.

보통 집에선 그냥 비단 댕기에 잘 익은 풋대추 같이 생긴 돌을 다듬어 민낯 석광을 달아 준다. 이 돌은 한약에 쓰이는 ‘석웅황’이라는 약제인데 뱀이 돌 냄새만 맡아도 기운을 못쓴단다. 조상들의 지혜다.

우리는 내 위로 작은 고모님 한 분, 내 아래로 여동생이 셋, 분가 하실 때까지 함께 살았던 사촌 여동생이 다섯, 이들이 학교를 다닐 때 아침은 상상 초월이다. 그래도 어머님과 숙모님께서는 딸들의 머리를 꼭꼭 땋아 댕기를 매 주시면 머리 꼬리가 뻗친다.

할아버지께서 “칠푼 짜리 돼지 꼬리 같다”며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팔순이 다 된 내게 눈에 선하다.

참으로 옛날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