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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사단 전투상보 첫 공개] 시민군 광주교도소 습격 없었다 …‘ 신군부가 조작’ 사실로
실탄 4만발 보급 96연대 투입
시위대와 20여차례 조우 했지만
지휘관 설득·권유로 자진 철수
경비병 3공수여단으로 교체후
항쟁 확산 차단 위해 무차별 사살

2018. 05.16. 00:00:00

518인분 주먹밥 만들기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을 사흘 앞둔 15일 오전 광주시 북구청 광장에서 열린 518인분 주먹밥 만들기 행사에 참가한 북구청 직원과 주민이 주먹밥을 만들고 있다. /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

신군부가 조작한 ‘시민군 교도소 습격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31사단의 기록이 처음 공개됐다.

이 기록에 따르면 광주교도소를 지키던 31사단은 실탄을 지급 받고 시위대와 20여차례 조우했으나, 이들을 설득해 자진 철수시켰다. 하지만 1980년 5월21일 오후 투입된 3공수여단은 시위대를 사살했으며 이를 두고 전두환 전 대통령 등 신군부는 현재까지 ‘교도소 습격설’을 주장하고 있다.

15일 김희송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연구교수가 공개한 31사단 전투상보 작전요도에는 시민군의 습격이 없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31사단은 5월20일 자정께 96연대 2대대 471명(장교 2명)을 광주교도소 경비에 투입했다. 21일 오전에는 헬기를 이용해 개인당 90발 분량인 실탄 총 4만발을 보급했으며 경비대대 250여명을 추가 배치했다. 31사단장은 ‘교도소 접근시 발포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지난 1995년 검찰조사에서는 광주교도소에는 2700여명이 수감돼 있었다.

96연대는 실탄을 지급받고 3공수여단과 교대하기 전인 21일 오후 7시20분까지 교도소를 방비했지만 시위대와 충돌 사실은 없었다.

31사단 전투상보(작전요도)에는 당시 광주교도소 일대 지형지물과 부대배치 위치가 손으로 그려져 있고, 시위대와 조우한 상황이 적혀있다. 작전요도 왼쪽 하단에는 5월21일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15∼16회 난동자와 조우했지만 수색중대장의 설득·권유로 자진 철수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오른쪽 상단에는 ‘5월21일 오후 1시∼5시 5∼6회 난동자와 조우, 11경비대대장의 권고·설득으로 자진철수’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31사단이 3공수여단으로 교체된 시점부터는 사살이 시작되는 등 상황이 급변한다. 군사전문가들은 이를 교도소 방비와 시위가 광주 외곽으로 확산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무차별 봉쇄작전을 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5월21일자 기무첩보보고 ‘광주 소요사태’(21-51호)를 살펴보면 이날 오후 8시 광주∼담양간 고속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있는 3공수 부대원들을 시위대가 산 위에서 경기관총으로 집중사격했다. 3공수 부대원들은 응사해 시위대 2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했다고 나와있다.

또한 같은 문서 오후 8시40분 상황을 살펴보면 ‘2군 사령관 경계 강화 지시 하달’ 사항으로 순천·전주 교도소 침탈이 예상되니 경계를 강화하고 무기가 피탈되지 않도록 조치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또, 지난 1995년 검찰조사에서는 계엄군들은 5월21일 낮 12시20분부터 5월23일 오전 10시20분까지 6회에 걸쳐 폭도들이 교도소를 기습공격해 8명이 사망하고 70여명이 부상당했다고 진술했다.

김희송 교수는 “이런 사실은 모두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다. 31사단과 달리 기계적으로 명령에 따라 작전을 수행하는 3공수여단은 민간인 피해를 고려하지 않고 누구나 접근하면 무조건 쐈을 것”이라며 “5·18 당시 광주에는 주유소가 몇군데 없어 차량에 기름을 넣기 위해 교도소 인근 주유소로 간 시민들도 희생됐을 개연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그는 “31사단 입장에서는 시위대가 교도소로 접근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향토사단인 만큼 대화를 먼저 시도했고 시위대가 자진철수하며 큰 마찰은 일어나지 않았다”면서 “신군부 입장에서는 광주 항쟁이 다른 지역으로 번지는 것을 가장 우려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희기자 kimyh@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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