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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시민군 등 8명 암매장 보안대서 소지품과 함께 사진 촬영”
[5·18 계엄군의 고백] <1> 3공수 15대대 김연철 하사

2018. 05.14. 00:00:00

3공수여단 출신 김연철씨가 지난 8일 강원도 태백시 한 모텔에서 옛 광주교도소 배치도를 살펴보고 있다. /강원도=김용희기자 kimyh@kwangju.co.kr

“제가 옛 교도소 부지에 직접 파묻은 일부 시신 가운데 발굴되지 않은 나머지 시신은 나중에 (계엄군 등이) 다시 파서 다른 곳으로 옮겼을 것입니다. 보안대 요원이 찍은 사진만 찾아내도 희생자들을 찾는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난 8일 강원도 태백시에서 만난 김연철(61)씨는 5월 희생자 암매장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목소리를 높였다.

3공수여단 15대대 14지역대 통신대에서 하사로 복무했던 그는 지난해 5·18기념재단이 진행한 옛 광주교도소 암매장 발굴조사에 참여, 5·18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는데 도움을 준 인물이다.

언론노출을 꺼렸던 김씨는 5·18 피해자와 광주시민들을 위해 어렵사리 인터뷰에 응했다.

김씨의 회상에 따르면 그는 1980년 5월20일 새벽 광주역에 도착했다. 주둔지를 전남대에서 광주교도소로 옮기던 21일 오후 첫 총기 사건이 터졌다. 그가 대대장 등과 선발대로 군용 지프를 타고 북구 각화동 농수산물시장 인근을 지날 때 뒷자리 있던 병사가 팔에 총을 맞은 것이다.

그때까지 김씨가 속한 15대대에서는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으나, 이후 교도소와 광주∼담양간 고속도로 방어를 맡으면서 실탄이 지급됐다. 기억이 흐릿하지만 실탄 860발, 수류탄, 최루탄 등이 배급됐다. 부대원들에게 접근하는 차량은 무조건 쏘라는 명령도 떨어졌다.

김씨의 부대원들은 22일 오전에 시민군의 트럭이 접근하자 M-16소총, M-60 기관총으로 일제히 조준사격을 했고, 트럭이 전복됐다. 김씨는 부대원과 함께 트럭에서 시신 3구를 수습해 시민 사망자 5명과 함께 교도소 남서쪽 인근에 가매장했다.

김씨는 지난 5·18재단의 암매장 발굴 조사 때 이들을 찾기 위해 해당 지역의 발굴 작업에 참여했지만, 매장자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교도소에 가매장한 시신을 계엄군이 다른 곳으로 옮겨 암매장했다고 본다.

그는 “우리가 시신을 매장하려는 데 보안대 요원들이 시신에서 소지품을 모두 꺼내 희생자의 가슴 위에 올려놓고 사진을 찍었다”며 “이 사진이 군이나 관련 기관에 남아 있다면 당시 숨진 이들과 실종된 이들도 찾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통신대 선임하사였던 김씨는 부대간 교신내용을 들을 수 있는 통신대에 근무했기 때문에 5월 당시 진압작전의 전반적인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광주를 동서남북 4개 지역으로 나눠 이른바 ‘싹쓸이 작전’까지 세웠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기억했다.

지난 1988년 광주청문회 때도 한 국회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가매장 사실을 제보하기도 했던 그는 5·18을 겪은 이후 공황장애를 앓는 등 각종 정신질환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를 진실의 증언대로 끌어낸 동력은 죄책감이었다. 광주시 북구 삼각동에서 나고 자란 그는 “5·18 기간 외사촌 등 같은 동네에서 친하게 살았던 동생 4명이 세상을 떠났다. 내가 가해자 입장이 될줄은 몰랐다”며 “당시 최고 지휘부였던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별 4개까지 달며 영웅이 됐지만, 부하들은 그날의 그 무서운 사건에 대해 큰 죄책감을 안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당시 군 지휘부 등에 대한 역사적 심판을 다시 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그는 “내가 공개적으로 이름과 얼굴을 밝히는 건 광주시민들에 대한 사죄이자 다른 부대원들이 5·18에서 자유로워지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강원도=김용희기자 kimyh@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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