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장성 백양사 골짜기에서 눈을 만났다. 도로변 벚꽃이 만개해 화사한 빛깔을 뽐내던 봄날이었다. 잠깐 사이 벚꽃 위로 눈발이 날렸다. 바람이 차가운 줄도 모르고 비현실적인 봄 속 겨울 풍경을 지켜봤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여러 날 화창한 봄날이 계속되더니만 갑작스레 기온이 뚝 떨어졌다. 광주 남구 사직공원 붉은 철쭉 위로 눈발이 세차게 몰아쳤다. 벚꽃 역시 어지러운 바람에 꽃잎을 마구 흩날렸다.

올해 봄은 유별나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 철쭉 등 온갖 봄꽃이 예전의 개화 순서를 무시하고 거의 동시에 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는 겨울이 오는 봄을 시샘하는 걸까? 찬란한 봄꽃 위로 거짓말 같은 눈발이 쏟아지다니….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봄비가 곳에 따라 봄눈으로 변했다. 상춘객들은 쌀쌀한 날씨 탓에 패딩을 챙겨 입고 봄나들이에 나서기도 했다. 광주 지방 기상청에 따르면 3월 평균 기온은 6.9도(2000년)→7.4도(2010년)→8.0도(2015년)→10.0도(2018년)로 매년 높아지는 추세이다.

조선 후기에 ‘시신’(詩神)으로 불린 중인 출신 시인 희암 현기(1809∼1860)는 ‘춘진일’(春盡日)이라는 시에서 꽃샘바람을 이렇게 노래한다.

“오늘 진 이 꽃은 어제엔 붉었던 것/ 가득하던 봄빛이 거의 다 텅 비었네/ 만약 피지 않았더면 떨어짐도 없었으리/ 봄바람 원망 않고 꽃샘바람 원망하네.”(정민 편역 ‘우리 한시 삼백 수’ 중)

‘춘진일’은 음력 3월 마지막 날을 의미한다. 번역자인 정민 한양대 교수는 이 시에 대해 “…원망할 것 없다. 안타까워할 것 없다. 그저 물 흐르듯 순리대로 살다 갈 일이다”라는 해설을 붙였다.

자연 변화는 순리다. 봄꽃 피는 때에 흩날리는 눈발은 봄기운을 꺾지 못한다. 겨울 끝자락에서 성급하게 꽃을 피웠던 나무들은 이제 낙화와 함께 열매를 맺고, 연두색 새잎을 내밀며, 머지않아 짙은 녹음(綠陰)을 드리울 것이다. 모처럼 대화의 창을 열어젖힌 남북 관계나 가슴 속에 꾹꾹 눌러둬야 했던 4·3과 같은 역사적 진실들이 나무들처럼 온몸으로 ‘봄’을 맞았으면 좋겠다.



/송기동 예향부장 s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