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에 대한 친근감은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 ‘이삭 줍는 여인들’을 마주했을 때, 옛집 벽에 걸렸던 그 그림과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을 떠올려주었다. 선잠 깬 내가 놀랐듯, 오밤중에 집으로 숨어든 아버지를 체포하러 순경들이 구둣발째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을 때 그림 속의 여인네들도 겁먹어 놀랐을 것이다.”(밀레의 ‘이삭줍는 여인들’에서)



‘마당 깊은 집’, ‘불의 제전’, ‘아들의 아버지’ 등 명작으로 유명한 김원일 작가. 한국 문학의 거장인 그가 이번에 미술산문집 ‘내가 사랑한 명화-김원일의 미술 산문집’을 펴냈다. 제목처럼 책은 작가가 평생에 걸쳐 사랑해온 그림(또는 조각) 46점이 걸린 마음의 화랑을 순회하며, 자신이 말하고 싶었던 내용을 문학적 상상력을 가미해 그려낸다.

어린 시절 내성적인 소년이었던 작가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글을 쓰는 작가로 살아오는 동안 내면에는 자신만의 명화가 자리했다. 책에서 언급된 46점은 시대와 국가를 초월해 오래 사랑받은 그림들이다.

저자는 단순히 ‘미술 감상의 길잡이’, ‘그림 읽기 안내서’만을 상정하지 않는다. 한 점의 그림을 통해 화가의 생애를 돌아보며 자신의 삶과 문학을 대입한다. 이데올로기를 좇아 가족을 버리고 북으로 떠난 아버지, 홀몸으로 자식들을 키워낸 어머니, 지독한 가난과 두려움으로 점철됐던 성장기, 막내아우의 죽음 등 곡절의 삶과 창작에 영감을 주었던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접목돼 펼쳐진다.

책은 2000년 작가가 쓴 미술산문집 ‘그림 속의 나의 인생’의 개정판으로, 20여 년 만에 새로운 구성과 판형, 디자인으로 새단장 됐다. 새로운 글을 추가하고 몇 편은 빼서 새롭게 구성한 것이다.

“그림이란 일절 선입관 없이 그림 자체로만 감상해야 한다는 원칙론에도 불구하고, 감상자들은 그 그림에 뒤따르는 에피소드와 그림 속에 담긴 이야기에 귀 기울여 작품을 해석하려 한다. 소설 쓰기가 생업인 나 역시 한 장의 그림을 볼 때,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따라가며 화가의 당시 삶을 엿보려는 습성이 있다.”

작가는 그림을 통해 화가의 생애와 그림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풀어낸다. 문학적 언어로 형상화한 산문집은 그의 굴곡진 삶과 화가의 생애와 얽혀 한 편의 소설 같은 느낌을 선사한다.

책은 모두 6부로 구성돼 있다. 1부 ‘예술가의 초상’에서는 렘브란트의 ‘두 개의 원이 있는 자화상’을 시작으로 로댕, 뭉크, 호퍼, 자코메티, 프리다 칼로, 베이컨의 작품을 소개한다. 2부 ‘사랑과 열정’은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를 비롯 앙리 루소, 고흐, 클림트, 로트레크, 코코슈카 등의 작품을 소개한다.

3부와 4부는 각각 ‘도전과 파괴, 재창조’, ‘자연, 이상향’이 주제다. 전자는 쿠르베의 ‘만남(안녕하세요, 쿠르베 씨)’,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포함 마네, 드가, 세잔, 마티스, 뒤샹 등의 작품을 소개하며 후자는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과 고갱, 샤갈 등에 초점을 맞춘다.

5부 ‘시대와 현실’은 고야의 ‘1808년 5월 3일’과 벤 샨의 ‘광부의 아내’ 등 핍진한 삶과 격동의 역사를 매개로 전개된다. 마지막 6부 ‘삶의 유한성’은 엘 그레코의 ‘베드로의 눈물’, 모네의 ‘임종을 맞은 카마유’ 등을 토대로 유한한 인간의 아픔을 들여다본다.

작가 김원일이 반백년 넘게 일구어온 삶과 문학, 예술에 대한 열정은 책에 소개한 화가의 생애, 예술혼과 공통적으로 닮아 있다. 그런 측면에서 책은 김원일이라는 예술가의 초상으로 볼 수 있다.

〈문학과지성사·1만6000원〉

/ 박성천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