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가야금 병창의 명인이 운영하는 어느 국악연구소에서 수강생들의 연주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가야금을 연주하는 이들은 초등생과 중고생들이었다.

국악에 문외한인 필자는 ‘학생들 연주 수준이 얼마나 되겠나’라는, 조금은 미심쩍은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연주가 시작되자 나도 모르게 절로 탄성이 나왔다. 실내를 물들이는 선율은 고아하면서도 처연했다. 앳돼 보이는 외모와 달리 학생들의 표정 또한 진지하고 엄숙했다.

국악연구소를 나온 뒤에도 한동안 가야금 선율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날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이 별세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창작 가야금 음악의 창시자이자 국악을 현대화한 거장으로 평가받는 선생의 타계는 그날 들었던 가야금 소리와 맞물려 묘한 여운을 주었다.

돌아보건대 황병기 선생은 ‘엄친아’의 표상이었다. 3대 독자로 태어나 경기중·고를 거쳐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고인은 지난 2013년 광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가야금 인생을 걷게 된 내력 등을 이야기했다. 6·25전쟁을 피해 부산의 천막학교에서 공부하던 시절, 가야금을 하던 어느 노인과의 만남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한다. 어느 분야든 일가를 이룬 이들에게는 단단히 ‘필’이 꽂히는 순간이 있나 보다.

고인은 “가야금으로 먹고 살 수 없어 한때 그만 둘 생각을 한 적도 있다”면서도 “시작한 만큼 진수를 맛보고 그만두자 생각을 했는데 진짜 맛을 알고 나서는 그만둘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선생은 첫 창작곡 ‘숲’을 비롯해 활로 연주한 ‘미궁’, 신라 음악을 되살린 ‘침향무’ 등 전통의 속살에 현대의 문화를 덧입히는 작업을 시도했다.

“사라져 없어져 버리는 것들이야말로 우리 영혼의 금선(琴線)을 울릴 때가 많다… 꽃잎에 맺힌 이슬, 심지어 그 이슬의 그림자조차도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가치가 있다. 음악은 사라지는 것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은 언젠가 수필집에서 음악을 그렇게 표현했다. 고인의 열정은 후진들에 의해 새로운 음악으로 피어나겠지만, 멋진 인생길을 걸었던 ‘현(絃)의 고수’를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으니….

/박성천 문화부 부장 sky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