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비상구’가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되는 때도 없다. 평상시에는 출입구가 아닌, 갑작스러운 화재나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이용하는 탈출구가 바로 비상구다.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는 말에는 이미 ‘압구정동’이 비상상황에 처해 있으며,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90년대 한국 소설의 한 정점을 이룬 작가”로 평가받는 이순원의 장편소설이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다. 지난 1992년 발간된 이 소설은 사회를 비판하는 작가의 개성적인 목소리가 아주 강하게 드러나 있다. 이후의 자연과 성찰을 매개로 치유의 화법을 구사한 작품들과는 달리 이 작품에는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부패와 타락을 규탄하고 있다.

이순원의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가 26년만에 ‘대한민국 스토리DNA’ 열여덟 번째로 출간됐다. 작품 속에는 매주 금요일마다 압구정동 주민을 대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의문의 ‘젊은 남자’가 등장한다. 그의 범행의 대상이 되는 인물들은 성착착증에 걸린 노파, 성전환수술을 한 트랜스젠더, 양재동 빌라의 방탕한 여대생, 룸살롱을 경영하는 복부인 등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등장한다.

이들을 ‘압구정동 주민’이라 칭하는 것은 그의 내면이 ‘압구정동’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타락한 한국식 자본주의 속성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와 시대의 희생자를 넘어 한국 사회 천민자본주의를 재생산하는 종류의 구성원이자 산물로 비쳐진다. 작중 ‘테러’의 대상으로 형상화되는 이유는 그 때문인 듯 하다.

〈새움·1만3800원〉

/ 박성천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