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적이다. 천정에 매달린 건 거대한 붉은 형상의 조형물이다.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 1층 전시실 전체를 차지한 작품은 15m에 달하는 ‘군도-섬 006’이다. 작품은 붉은 빛깔 수많은 종이 가닥으로 만들어졌다. 다양한 문양의 종이는 미세하게 흔들리고 작품 속에 설치해놓은 조명을 받아 앞뒤전후 사방에서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유심히 들여다 보니 허공에 매달린 건 ‘사람’이다.

작품을 제작한 신호윤(43) 작가는 “떠돌아다니는 느낌, 부유(浮遊)하는 느낌을 담고 싶었다”며 “저를 포함한 현대인들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바로 저렇게 살아가는 것 아니냐”고 했다.

‘종이’를 소재로 작업하는 신 작가는 지난해말 광주시립미술관이 주최하는 ‘청년작가 초대전’에 선정돼 2월 25일까지 초대전 ‘신호윤-피안의 섬’전을 열고 있다. 청년 작가가 공립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여는 건 큰 행운이다.

신 작가는 지난해 ‘광주미술상도 받았다. 선배 작가들이 기금을 마련해 수여하는 이 상은 미술인들이 가장 의미있게 받아들이는 상이다. 신 작가 역시 “존경하는 선배님들에게 받은 상이라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2009년작부터 현재까지 작품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흥미롭다. 미술관 잔디밭에도 작품이 전시돼 있으며 작가의 육성을 만날 수 있는 영상도 상영중이다.

어려서부터 무언가를 만들기 좋아했던 그는 미대 출신인 어머니의 권유로 조선대 미대에서 조소를 전공했다. 초창기, 설치 미술을 베이스로 영상, 웹툰 등 다양한 영역의 작업을 진행했던 그는 한 때 미술을 그만두려고도 했었고 그 때 만난 게 바로 ‘종이’였다. 가까운 친척이 미국에서 사망해 슬픔에 빠져있을 즈음 한 갤러리에서 ‘가을편지’를 주제로 작품을 요청했다. ‘허망하게 꺾여버린’ 친척에게 수의를 입혀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면지 등을 잘라 종이로 수의를 만들었고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이 작업 이후 ‘종이’는 신 작가의 주요 소재가 됐다.

신 작가는 종이의 양면성에 주목했다. 보편적이고 대중적이고 부드럽고 따뜻한 촉감을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쉽게 구겨지고, 찢겨지는 게 꼭 인간같다는 생각을 했다.

‘수상한 꽃’ 연작은 종이와 함께 거울을 소재로 삼아 관람객이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다. “2007년 당시 유학갔다온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던 시절이었죠. 외국 문화에 대해 고민 없이 무조건 수용하는 모습에 문제 제기를 하고 싶었어요. 우리 전통문화는 왠지 구태의연한 것으로 치부되던 시절었으니까요. 조화로운 수용이 필요하다고 봤죠.”

‘본질은 없다’ 시리즈는 다비드상, 피에타상, 석가여래좌상 등 우리에게 친숙한 형상들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종이를 자르고 접착제를 붙여 만든 작품들은 앞쪽에서 보면 형상이 없지만, 옆에서 보면 그제서야 형상이 보인다.

“어쩌면 눈앞에 보이는 이미지는 허상일 뿐이고 결국 그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인 인간일지도 모릅니다. 눈 앞에 있다고 다 진실이라는 법은 없죠. 허상이 아니라 현상을 보는 진짜 학습을 해야합니다.”

자화상을 담은 ‘군도’ 시리즈는 “고독, 우울증, 대인 기피 등 현대인의 공포의 기저에는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며 만들어낸 작품”이라며 “그 고독을 즐기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종이 대신 철로 작업한 작품 ‘반가사유상’을 처음 선보였다. 중국에서 주로 진행하고 있는 작업으로 철을 가늘게 절단 한 후 5000여개 볼트와 1만여개 너트로 조립한 작품이다. 소재 다양화와 작품 대형화의 출발점이다.

처음부터 종이 작업을 인정받은 건 아니었다. 2009년까지도 대리운전, 배달, 막노동 등 일부러 ‘미술과 관련 없는’ 아르바이트를 2∼3개씩 했다. “종이로 작업하는 게 생활이 되겠냐”는 이야기를 들을 땐 ‘오기’도 생겼다. 힘을 실어준 건 2010년 쾰른 아트페어에 참가였다. 외국 컬렉터들에게 반응이 좋아 작품을 모두 판 게 계기가 됐다. 2012년 광주시립미술관 북경창작센터 입주작가 활동은 전환점이었다. 이후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작업하고 있고 그 때 인연으로 현재 홍콩 문화기획사 ‘Platform D’art’의 전속작가로도 활동중이다.

한 가지 소재로 작업하는 건 힘든 일이다. 슬럼프가 없었냐는 질문에 그는 “바로 지금”이라며 웃었다.

“지금의 종이 작업을 꾸준히 하겠지만 새 작업에 대한 고민들이 많아요. 이게 신호윤 작품이야? 애가 왜 이런 작업을 하지? 하는 그런 작품을 하고 싶은데 새로운 시도가 쉽지만은 않네요. 키네틱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종이 작업도 생각중인데 그러면 공학을 공부해야 해요. 사운드 아트쪽도 고민중입니다. 몸부림 중이고 방황중이죠.(웃음)”

중국 활동을 병행하는 신 작가는 올해 홍콩 아트페어 참여와 함께 홍콩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질 예정이다.

“예전에는 작가가 이 사회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요즘엔 작가는 사회의 관찰자라는 생각을 합니다. 작품을 통해 사회 현상에 대해 압축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합니다.”

신 작가는 좋아하는 선배들로부터 작가의 직업윤리, 작업하는 태도 등에 대해 많은 걸 배웠다고 했다. 또 대학 시절 휴학 후 울진 원전, 삼성 반도체 공장 건설현장 등에서 일하며 세상을 배웠다고 했다. 신 작가는 20대 후반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적이 있고 그 때 ‘버킷 리스트’를 썼다.

“당시 오래 못 살거라고 생각했어요. 마흔까지 살면 많이 살거라는 생각에 죽기 전에 해야할 일을 써내려갔죠. 나 대신 너무 고생한 각시 일 그만두게 하는 것, 집 사는 것, 외국에서 전시하는 것 등등을 적었어요. 열심히 이루려고 했고 다 이뤘더라구요.(웃음)”

‘새로운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야하지 않겠냐는 말에 그는 웃기만 했다.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