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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재의 세상만사] 당신은 전설이었습니다

2017. 11.24. 00:00:00

당신은 우리에게 전설이었습니다. 인품이나 재능이나 그 무엇 하나 따라가기 힘든 분이었으니, 그야말로 전설 속의 인물로 여겨질 수밖에요. 특히 글솜씨는 천부적으로 재능을 타고나셨던 것 같습니다. 칼럼 하나 쓰기 위해 몇 날을 끙끙대야 하는 저로서는 참으로 부럽기만 합니다. 맛깔스러운 글도 일품이었지만 당신의 속필(速筆) 또한 마치 전설처럼 후배들에게 전해져 옵니다. 마감을 위해서는 자동차 속에서도 심지어, 화장실 안에서도 원고지 위에 펜을 달리곤 했다지요.
주업이었던 언론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체육·정치 등 당신의 업적은 모든 분야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지방에서뿐만 아니라 중앙무대에서도 다방면에 걸쳐 왕성한 활동을 하셨지요. 바쁜 일정 때문에 서울-광주 간 비행기도 자주 이용하셨는데, 당신은 광주로 오는 비행기 속에서도 후다닥 글을 써내려가곤 했습니다. 비행시간이라 해 봐야 불과 몇십 분일 터인데 그 짧은 시간에 한 편의 글을 완성하시곤 했다니 경탄, 또 경탄할 따름입니다.
누군가는 당신의 글 쓰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펜은 발동기를 단 듯 잠시도 쉬지 않았고, 머릿속에서는 마치 거미줄처럼 생각이 거침없이 흘러나와, 원고지에 글자로 새겨졌다”고요. 그렇습니다. 평소 풍부한 지식과 함께 높은 식견이 없고서야 어찌 그리 빠른 시간 안에 글을 마무리할 수 있었겠습니까.
당신의 글은 제가 신문사에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지면을 통해 늘 보아 왔던 터였습니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제호를 달고 나오는 당신의 글에는 늘 인간적인 향기가 있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즐겨 휘호로 쓰기도 했던 대도무문-큰 길에는 문이 없으니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큰 도리나 정도(正道)에는 거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생전에 대도무문이라는 제호를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셨다는데, 거기엔 아마도 ‘붓을 들어 종횡으로 거침없이 달린다’는 뜻도 담겨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문화·예술·언론계의 거두

제가 당신을 처음 뵌 것은 20대 ‘병아리 기자’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당신은 이미 칠순을 향해 달리고 계실 때였으니 제가 당신과 함께 한 세월은 고작 10년도 못 됩니다. 하지만 예전부터 당신의 글을 많이 봐서인지 처음 뵐 때부터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선배들은 당신이 따스한 인간미의 소유자라며 이런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지요. 공무국 직원들에게 종종 돼지고기와 막걸리 파티를 열어주곤 했다고요. 당시만 해도 컴퓨터 시스템이 없었기에 신문사 공무국에서는 문선공(文選工)이나 식자공(植字工)들이 납 활자를 만져야 했습니다. 직원들의 납 중독을 염려했던 당신은 ‘납 중독에는 돼지고기가 좋다’면서 그렇게 세심한 배려를 해 주셨던 것이지요.
당신은 참으로 정력도 좋으셨던 모양입니다. 아무리 말술을 마셔도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새벽에 출근했습니다. 밤마다 술타령을 거르지 않아도 ‘술 마시는 저녁, 일하는 아침’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그 뒤로 ‘술 마시는 저녁 일하는 아침’은 광주일보 기자들의 모토(motto)처럼 되어, 우리는 어설피 당신을 흉내 내기도 했습니다.
당신은 술도 잘했지만, 음치였다고 스스로 고백했던 천경자 화백과는 달리 노래 실력도 일품이었다지요. 수기동 뒷골목 선술집이나 기생집 등 가리지 않고 술집을 드나들며 술자리 분위기를 이끌었습니다. 변사 흉내도 잘 냈다니 참, 재주도 많으셨습니다.
잠시 펜을 멈추고 많은 저명인사들이 당신의 삶을 기록한 책 ‘바삐 살다간 사람’을 펼쳐 봅니다. 당신은 1917년, 지금의 광주 금남로 3가에서 광주 지역 대농(大農)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930년 광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동경(東京) 센슈대학(專修大學) 전문부를 수료했으며, 1942년 일본 호지신문사(報知新聞社) 기자가 되었습니다. 1943년 고향으로 돌아와 ‘전남신보’ 사회부장으로 일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주간이 되었고 1947년 ‘호남신문’ 편집국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1952년 ‘전남일보’(지금의 광주일보)를 창간하고 발행인 겸 주필·사장에 취임하여 1987년까지 호남을 대표하는 언론인으로 언론 창달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습니다. 따라서 당신의 삶은 온전히 초창기 광주일보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리운 그 이름 남봉 김남중

1957년 전라남도 체육회장에 피선되어 전라남도 체육 중흥에 앞장섰고, 1960년 초대 참의원으로 낙후된 국내산업 육성 기반을 구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1962년엔 한국신문협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1980년까지 18년 동안 상임부회장으로 한국신문협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수필가로도 활동했던 당신은 1969년 국제펜클럽 한국대표위원이 되었으며, 1970년 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남지부장에 추대되어 1980년까지 10년 동안 열악한 전라남도 및 광주 지역 예술문화단체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1971년 전일방송사를 설립하여 대표로 취임하였고, 1978년 호남전기주식회사를 인수하여 1987년까지 회장을 지냈습니다.
당신이 1958년부터 1980년까지 ‘전남일보’(지금의 광주일보)에 쓴 칼럼 ‘대도무문’(大道無門)은 무려 2189편이나 됩니다. ‘사요나라의 나라’ ‘삼등열차’ ‘월평선’ ‘바람을 보는 사람들’ ‘여정천리’ ‘대도무문전집’ ‘바람과 구름과 함께 가는 여로’ ‘인생연극’ 등 주옥같은 글을 모은 책들은 제목만 대충 훑어 보아도 감회가 깊습니다.
이제서야 밝히는 당신의 이름은 남봉(南鳳) 김남중(金南中, 1917∼1987)입니다. 올해는 당신이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요 타계한 지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지금, 당신이 걸어온 삶의 아주 작은 편린(片鱗)이나마 들여다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남봉’은 남쪽 하늘을 나는 봉황새입니다. 천릿길에 지쳐도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대나무 열매 아니면 먹지 아니한다는 전설의 새. 당신의 호 남봉(南鳳)에는 당신이 이루고자 했던 큰 꿈이 담겨 있음을 잘 압니다.
당신이 고희(1986년)를 맞았을 때 당신을 위해 서정주 시인이 지어 준 고희송(古稀頌)을 가만히 읽어 봅니다. “옛날에 좋은 하늘의 봉황새 하나/ 전라도 오동나무가 그리워/ 무등산 근방에 내렸었나니/ 봉 잡기를 좋아하는/ 전라도 사람들 사이에 놓여/ 늘 순탄한 웃음만으로/ 일흔 해를 넘겼다는 건/ 역시나 큰 봉황의 힘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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