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갇힌 성 안에서는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이 한 덩어리로 엉켜 있었고,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으며…”

작가 김훈은 소설 ‘남한산성’에서 치욕스러웠던 병자년(1636) 역사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압록강을 건넌 청의 무리가 한양으로 물밀듯이 내려오는 상황이었다. 사면초가에 빠진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하고, 이후 47일간의 시간은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소설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 내몰린 조선의 운명을 정치하게 그려낸다. 지난 2007년 초판이 발행된 지 10년 만에 100쇄를 돌파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최근에는 동명의 영화가 개봉돼 원작의 감동을 영상 언어로도 느낄 수 있다.

소설과 영화는 첨예하게 대립하는 두 진영에 초점을 맞춘다. 주화파(최명길)와 척화파(김상헌)의 치열한 논쟁은 칼날보다 더 날카롭게 부딪힌다. 죽음으로 대의를 지키자는 척화파와 치욕스러울망정 살아서 생을 담보하자는 주화파의 논쟁은 무참하고 가혹하다.

현대사에서도 그와 같은 고통스럽고 참담한 시간이 있었다. 80년 5월, 공수부대의 도청 진압이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에서 시민군들은 절체절명의 순간과 맞닥뜨려야 했다. 죽음으로써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자는 의견과, 더 이상 희생을 치르기보다 살아서 진실을 밝히자는 의견 말이다. 물론 역사적 배경이 달라 ‘남한산성’과 ‘오월 광주’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는 무리다. 그럼에도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생과 사의 운명과 마주해야 했던 극한의 상황은 그 자체로 처참하면서도 비극적이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작금의 시대 상황 또한 병자년의 운명과 별반 다르지 않다. 북핵 문제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난마처럼 얽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코리아 패싱’ 논란은 고립무원에 빠진 우리 정부의 딜레마를 말해 준다. 혹자는 미국과의 관계를 조선과 명나라와의 관계로 비유하면서 친미와 반미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를 경계한다.

김훈은 ‘남한산성’에서 다시 이렇게 읊조린다.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안에서 싸우고 또 싸우고,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고. 정말로 경계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갇힌 성안에서 싸우는 일’ 아닐까.

/박성천 문화부 부장 sky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