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만나러 가는 ‘드맹’ 엘리베이터 안에서 눈에 띈 건 장석주의 시 ‘대추 한 알’이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가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드맹이 패션 하우스일 뿐 아니라, 아트홀을 운영하고 시 관련 강좌도 여는 문화공간임이 떠올라 “참 어울린다” 싶었다.

패션 디자이너 문광자(72)씨가 ‘드맹’이라는 상호를 내 걸고 옷을 만든 지 50년을 맞았다. 1967년 9월23일 작은 디자인스튜디오를 연 게 출발이었다. 바로 그날인 23일 오후 5시 광주시 동구 오가헌에서 ‘드맹 50주년’ 기념 패션쇼가 열린다. 광주에서의 패션쇼는 20여년 만으로 10월에는 드맹아트홀에서 감사 음악회도 열 계획이다.

“이번에 빈티지 자수를 활용한 옷들을 선보입니다. 오랫동안 모아놓은 자수를 빨아 다리고 오리다 보니 절로 50년 세월을 돌아봐지더군요. 어떤 땐 새벽 두시가 넘어가기도 했는데 50년 전, 30년 전 일들, 고객들 얼굴이 생각났어요. 디자이너는 자기 옷을 입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의미가 없거든요.”

문 씨는 어릴 때부터 꼼지락 꼼지락 옷 만들기를 좋아했다.

“제가 눈썰미가 좋았어요. 어머니가 모아놓은 모시, 삼베 천으로 이것 저것 만들고는 했죠. 동생 원피스도 만들어 입히구요. 어느날 어머니가 “치마가 있는데 잘 안 입어진다”며 내놓으시는데 제 실력을 인정해주는 것 같아 좋아라 하며 옷을 만들었죠.”

조선대 의상학과를 졸업한 그녀는 서울 국제복장학원에 들어가 7개월간 오전반과 야간반에서 공부하며 매일 한벌씩 옷을 만들었다. 항상 자신만의 공간을 꿈꿨던 그녀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내친 김에 1967년 옛 광주YWCA 공간을 빌려 숍을 열었다. 상호는 패션의 본고장 ‘블란서’ 말로 ‘내일’을 뜻하는 ‘드맹’으로 정했다. 이후 관광호텔, 충장로 2가 등에서 숍을 운영했던 그녀는 1971년 결혼 후에는 아이들을 키우며 집에서 옷을 만들었다. ‘드맹 안집’ 시절이다.

그녀가 주부보다는, 디자이너에 방점을 두고 프로 의식을 갖게 된 건 1983년 뉴욕에 다녀온 후다. 발렌티노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보면서 디자이너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 그녀는 서울패션협회와 교류도 하고 패션 잡지 ‘멋’에 소개되기도 했다.

문광자 하면 많은 사람들이 ‘무명옷’을 떠올린다. 1992년부터 염색 장인 한광석 선생의 천으로 무명 옷을 만들기 시작한 그녀는 ‘디자이너 문광자의 무명으로 만든 옷’(1, 2)를 펴내고 뉴욕 소호와 하와이, 서울에서 전시회와 패션쇼를 열기도 했다.

“하얀 무명천에는 카리스마가 있어요, 위엄이 있다고 할까요. 사람에 비유하면 가슴이 넓은 진실한 남자, 인간미 넘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보통 무명의 수명이 100년이라고 해요. 물빨래가 가능하죠. 잘 세탁해 다려 입으면 30∼40년 거뜬히 입을 수 있어요.”

최근에는 무명의 ‘순백’ 그 자체를 살리고 자수와 레이스를 바느질한 의상을 제작한다. 이번 패션쇼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이다. 또 조각보로 만든 옷도 선보인다.

21년 전, 광주 천변에 문을 연 하얀색 건물 ‘드맹’은 독특한 디자인으로 한동안 광주의 랜드마크였다. ‘드맹’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드맹아트홀’이다. 문씨는 언젠가 개인 건물을 갖는다면 꼭 문화공간을 만들고 싶었고 그 꿈을 실현시켰다. 야마하,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갖춘 공연장에서는 클래식 공연이 많이 열렸다.

“음악회가 열릴 때 아트홀에 앉아 있으면 참 행복하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기도 하구요. 작은 공간에서 듣는 음악의 감흥은 큽니다. 스페인산 수작업 의자를 갖춰놓았는데 20년 넘은 지금까지도 어긋난 게 하나도 없어요. 공연 후 예술가와 관객이 어울리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 카페도 열었죠. 한집 걸러 커피숍인 요즘에도 이 공간을 없애지 않고 두는 이유입니다.”

이번 50주년 기념 행사는 고객들에게도 추억을 남겼다. 잡지 ‘노블리스’는 오랫동안 그녀의 ‘무명옷’을 구입한 수십명의 고객 사진을 촬영, 별책 부록으로 발행한다. 고객들은 4일 동안 의재미술관 등에서 무명옷을 입고 사진 촬영을 했다. 별책에는 최근 큰 아들 이인수 정신과 전문의와 책 ‘누구의 인정도 아닌’을 펴낸 남편 이무석 전 전남대 교수와 화가로 활동중인 둘째 아들의 축하글도 실린다.

“사람들이 제 옷을 보고 “드맹옷 같구만”, “드맹 옷이네” 하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요. 저만의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거든요. 고객들이 있어 제가 있는 거죠. 그들이 박수를 보내고 공감하고 감탄해줄 때마다 옷을 만드는 힘이 되거든요.”

취재 중 만난 한 고객은 20년도 넘은 문씨의 옷을 입고 있었고 그 모습에선 오랜 신뢰가 느껴졌다.

‘행복하게도’ 그녀의 옷 만들기는 대를 잇고 있다. 미국에서 패션 마케팅을 전공한 딸 에스더씨가 지금은 드맹 대표를 맡고 있고 외손녀 역시 단국대에서 패션을 전공중이다.

“며칠 전 수업에서 묘비명에 대한이야기가 나왔는데, 전 “이 사람, 꿈꾸다 갔다” 이렇게 쓰고 싶다고 했어요.”(웃음)

드맹아트홀에서 시 수업을 듣고 있는 그녀와 나눈 마지막 대화다. 그녀는 오늘도 또 다른 꿈을 꾼다.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