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늦은 시간까지 술을 먹어서는…” “네가 먼저 유혹한 것 아니야?” “성폭력 피해는 비정상적인 애들이나 당하는 거지.” “혹시 돈 때문에 고소한 것 아니야?” “그렇게 될 때까지 너는 뭐했어?” 등 언젠가 한번 쯤, 당신이 성폭력사건을 접했을 때 해봤던 말 혹은 의문일 것이다.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무엇을 했는지, 왜 그랬는지 심지어 피해시간이 언제였고 옷을 어떻게 입었는지 알아내려고 하고 있다. 사건과 무관한 피해자의 정보에 관심을 가지며 그 피해의 원인을 피해자의 탓으로 돌리는 통념들은 성폭력 피해 생존자가 범죄의 피해자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상실하게 한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우리 사회에서 보다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다.

법은 가해자의 심신 미약 상태를 고려하고 피해자와 사건을 노출시키는 성폭력사건 국민참여재판을 수용한다. 언론은 소위 기사 조회 수를 높이기 위해 자극적인 제목을 뽑아내며 피해자의 동의 없이 사건 내용을 기사화한다. 미디어매체는 성폭력사건을 “00녀”사건 등 여성혐오적 표현을 난무하며 피해자에 대해 ‘수사’하기 시작한다. 또 수사기관에서는 피해자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피해자의 주변인에게 “성폭력으로 신고해서 멀쩡한 남자들 이렇게 많이 잡는다”고 가해자를 두둔한다. 피해자의 주변(가족, 친구 등의 지인)에서는 아직도 조선 후기를 살고 있는 듯 한 사람들이 정조관념을 적용하며 성폭력 피해 생존자가 아닌 ‘몸을 버린 사람’으로 치부한다. 법적, 제도적, 사회적, 정서적으로 이들이 피해자로서 보호받을 수 있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건의 원인을 피해자로부터 찾으려고 하는 시도들과 사회 전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은 피해자에게 또 다른 가해 즉, 2차 가해가 된다. 또 다른 가해 속에서 피해자는 끊임없이 본인의 피해사실을 스스로 증명해야하며 본인을 피해자화 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렇다 할 지지기반도 없이 치유되지 않는 본인의 폭력 경험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일은 절대로 쉽지 않다. 결국 피해자는 ‘회피’, 다시 말해 가해자가 ‘합의’라고 부르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합의 과정에도 성폭력 피해 생존자에 대한 수많은 폭력이 숨어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법적, 제도적, 사회적 보호와 지지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피해자는 ‘합의 종용’에 시달리게 된다. 가해자와 그의 변호사는 피해자에게 고소 취하와 합의를 종용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연락한다. 합의의 유무에 따라 형량의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 뿐만이 아니다. 가해자의 주변 인물들 역시 피해자에게 고소 취하와 합의를 종용, 협박하고 피해자의 관계자들에게도 끊임없이 연락한다. 심지어 불법적으로 피해자와 관계있는 이의 주소나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합의를 시도하기도 한다. 실제 피해자들은 이런 상황에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다들 내가 잘못했다고 욕하는지 모르겠다”고 호소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 우리는 합의금을 받은 피해자를 향해 자신들의 추측이 들어맞아 신이 나기라도 한 냥 손가락질을 멈추지 않는다. “성폭력으로 신고하고 얼마 받았데”, “신고한 이유가 다 있었어” 피해자는 이제 성폭력 피해 생존자로 사회에 나설 수 없게 된다.

사회 전반에 팽배한 성폭력 피해 생존자에 대한 2차 가해, 어디서부터 수정해야 하는 것일까? 필자는 현재 우리 사회의 성폭력사건이 너무도 개인화돼 있다는 것을 느껴야한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고 상담, 지원한다고 해서 성폭력을 예방할 수는 없다. 우리 사회의 다각적인 노력, 인식의 전환이 절실하게 필요하며 피해자를 지지하고 보호해 줄 수 있는 제도적, 사회적, 정서적 장치를 마련해야한다.

성폭력사건은 ‘나에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사건이 아니다. 단지 드러나지 않을 뿐 우리사회 도처에 빈번히 일어나며, 불편함을 회피하는 우리는 이를 보이지 않는 척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회피하게 되면 결국, 성폭력 피해 생존자 역시 회피를 선택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과 연대해 그들의 지지기반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땅의 모든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에게, 우리가 연대함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