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스포츠/연예
오피니언
기획시리즈
사설
칼럼
이홍재칼럼
기자노트

[이홍재의 세상만사] 산을 만나면 길을 뚫고 물을 만나면…

2017. 06.30. 00:00:00

“반중(盤中) 조홍(早紅)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柚子) 아니라도 품엄즉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업슬새 글로 설워하노라”
잘 아는 대로 정철·윤선도와 함께 조선 3대 시가인(詩歌人)으로 불리는 노계 박인로(朴仁老, 1561∼1642)의 시조다. 그가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을 찾아가 귀한 홍시를 대접받은 것은 선조 34년이었다. 그 자리에서 돌아가신 어버이를 떠올렸지만 홍시를 품어다 바치고 싶어도 정작 반길 이가 없으니 얼마나 서러웠겠는가.
박인로가 이덕형을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이덕형이 사도제찰사로 영남 고을들을 순찰하던 중 영천(榮川)에 이르렀을 때다. 이때 영남 지역의 유림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 중에 박인로도 있었다. 당시 둘의 나이는 41세로 갑장이었으니 금방 친해졌겠다. 시조는 그렇게 해서 탄생할 수 있었다.
그에게 홍시를 대접한 한음 이덕형은 오성 이항복과 함께 많은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영의정까지 지낸 그는 수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전란 중 명나라의 파병을 성사시킨 일도 그 중 하나다. 당시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는 청원사로 가면서 그가 오성에게 했던 말은 감동적이다. “만약 내가 군을 이끌고 오지 못하면, 중국에 내 뼈를 묻고 다시는 압록강 너머로 돌아가지 않겠다.”
나라가 어려울 때는 저런 결기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 지금의 우리나라 또한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그때나 마찬가지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안보는 미국에, 경제는 중국에 의지해야 하는 상황 때문이다.

미·중 사이의 샌드위치 신세

특히 사드 배치를 둘러싸고 시진핑과 트럼프로부터 동시에 압박을 받고 있는 판에 과연 ‘당차고 멋있는 여자’라지만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문 대통령과 함께 어떤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는지? 이럴 때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5000년 한국 역사상 최고의 외교관으로 불리는 고려 초의 문신이자 군인인 서희(徐熙, 942∼998)다.
그는 역사상 최고의 협상가로, ‘칼보다 무서운 혀를 지녔다’는 평을 듣는다. 때는 거란의 1차 침입이 있었던 해다. 고려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들 거란의 요구대로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주고, 화평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의 침략 의도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끊는 데 있다는 것을 간파한 서희는 거란족의 장군 소손녕을 만나겠다고 자청한다.
서희를 맞은 소손녕은 자신이 대국의 귀인이니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서희는 왕이 보낸 사신으로 대우해 달라며 당당하게 거절한다. 그처럼 먼저 기선을 제압한 그는 정확한 정세 판단으로 우리 땅을 떼어 주기는커녕 전쟁을 하지 않고도 오히려 영토를 얻어 왔다. (이후 서희는 여진족을 몰아낸 뒤 강동 6주를 고려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로써 고구려 멸망 이후 처음으로 국경이 압록강에 이르렀다.)
이러한 뛰어난 성과는 말만 번드레하게 잘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국제 정세를 읽는 눈이 탁월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불리한 처지에서 벌인 담판이었지만, 거란이 송나라와 전쟁 중이어서 고려 정복에 큰 힘을 쏟기 어렵고, 고려를 견제하는 것에 만족하리라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고려가 송나라와 관계를 끊는 대신, 거란으로 가는 길목인 압록강 동쪽 280리 지역을 돌려받기로 했다. (거란은 뒤늦게 이 지역이 중요한 군사 지역인 것을 알고 되돌려 달라고 했지만, 고려는 거부했다.)
비록 그들의 요구대로 국교를 맺어 이후 일시적으로 사대의 예를 갖추었지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거란의 대군을 돌려보내고, 오히려 이를 전화위복으로 삼아 영토까지 얻었으니 우리 역사상 가장 실리적으로 성공한 외교였다. 송과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 거란의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꿰뚫고, 또한 산악지대 전투에 자신감을 잃은 거란군의 상황을 읽어 낸 통찰력, 논리 정연한 언변, 거기에 예의 바르면서도 당당한 태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과거여행을 마치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보자. 엊그제 문재인 대통령이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으로 출국했다. 취임 후 첫 정상회담이자 국제무대 데뷔다. 공식 정상회담은 우리 시각으로 오늘 열리게 된다.
언론은 문 대통령이 미국에서 역대 한국 대통령 사상 최고 수준의 파격 예우를 받았다며 수선을 피운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후 외국 정상 부부와 백악관 공식 환영 만찬 일정을 잡은 것은 문 대통령이 처음이니 그럴 만하다. 게다가 미국 첫 공식 방문길에 블레어 하우스에서 3박 이상을 하는 한국 대통령도 문 대통령이 유일하다고 한다.

안보와 경제 두 마리 토끼를

좋은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 이러한 파격적인 환대의 기류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사드 배치와 비용 문제 혹은 한미 FTA 재협상 등을 놓고 트럼프로부터 어떤 요구가 불쑥 불거질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문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통해 안보와 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무거운 책무를 안고 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사드를 물릴 것도 아니라면 미국과의 동맹 외교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 사드로 인한 경제 압박과 위안부 합의 문제 등 난제가 산더미처럼 쌓인 중국이나 일본과의 관계를 푸는 일이다.
이는 훨씬 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문 대통령 앞에는 진실로 ‘산을 만나면 길을 만들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아야 하는’ 절박한 과제가 놓여 있는 셈이다. ‘봉산개도 우수가교’(逢山開道 遇水架橋)는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曹操)의 말인데 과거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미·중 전략경제대화 개막식에서 강조했던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정학적으로 강대국 틈에 끼인 신세인 우리나라로서는 ‘길을 만들고 다리를 만들어’ 온갖 난관과 애로를 뚫고 나간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점을 이해한다면 우리 일반 시민이나 야당이 취해야 할 자세는 자명해진다. 그것은 설령 대통령이 그들의 비위를 맞춰 준다 해서 사대(事大)라 쏘아붙이지도 말고, 당당하게 할 말을 한다 해서 당장 나라가 망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도 말자는 것이다.
다만 문 대통령이 실타래처럼 얽힌 난제들을 차근차근 풀어 나갈 수 있도록 조용히 기다리고 지켜보는 것도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여기에 국제 무대 경험이 많은 백발의 강 장관이 구국(救國)의 외교를 펼쳤던 고려 시대 서희처럼 뛰어난 역량을 발휘해 주면 더욱 좋은 일이고.

기사 목록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