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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재의 세상만사] 도대체 누가 누구를 비판하는가

2017. 06.09. 00:00:00

휴대전화 벨이 울린다. 지역번호 ‘02’가 화면에 뜬다. 서울에 아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 필경 ‘스팸’일 것이다. 그래도 한번 받아 볼까? 혹시 청와대에서 연락했을지도…. 이참에 한자리 주겠다면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무래도 ‘청문회’ 무서워서 거절해야 할 것 같다.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裡)에 속옷까지 온통 발가벗겨지는 그 수모를 내 어찌 감당하겠나. 헛된 망상 버리고 그냥 ‘무관유한’(無官有閑)의 즐거움이나 누리자.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씨름’을 보면, 유일하게 화면의 바깥쪽을 응시하고 있는 아이가 있다. 엿 파는 소년이다. 아이는 엿이 담긴 목판에 연결된 기다란 띠를 X자 모양으로 양 어깨에 둘러맸다. 조선시대에는 이처럼 목판을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엿을 팔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렸을 때 본 엿장수는 리어카(손수레)를 끌고 다녔다. 손수레 위에는 널빤지로 만든 엿 목판을 올리고 그 아래엔 고물을 넣었다. ‘짤그락 짤그락’ 어디선가 엿장수의 가위 놀리는 경쾌한 쇳소리가 들려오면, 우리들은 너나없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가난했던 시절이라 현금을 내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부러진 숟가락이나 찌그러진 양은 냄비 또는 빈병이나 쇠토막 따위의 온갖 고물을 들고 나와 엿으로 바꿔 먹었다. 엿가락을 부러뜨려서 그 속의 구멍 크기나 수효를 겨뤘던 엿치기의 기억도 새롭다.
엿장수가 가지고 다니던 엿에는 우선 가늘게 뽑은 흰 가래엿이 있었다. 또한 덩이째 목판에 얹혀 있는 엿에 끌(연장)을 댄 뒤 가위 손잡이로 ‘땅땅’ 내려쳐서 떨어주던 붉은 갱엿(‘판엿’)이 있었다. 이때 엿을 얼마나 줄 것인가는 순전히 엿장수 맘이었으니, 고물을 주고 바꿔 먹는 엿의 양은 그때그때 달랐다. ‘엿장시 맘대로’라는 속담이 생겨난 이유다. 그렇다면 엿장수는 1분에 가위질을 몇 번이나 할까? 다 알다시피 ‘엿장시 맘대로’다.

판사, 엿장수 그리고 스님

오늘, 엿에 얽힌 오래된 추억을 떠올려 본 것은 문득 ‘엿장수 판사’ 효봉 스님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효봉(1888∼1966)은 근현대 한국 불교계에서 가장 극적인 삶을 살았던 고승이다. 그는 원래 판사였다. 속명은 이찬형. 1913년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한 뒤 우리나라 최초의 판사가 되었다. 그가 판사직을 버린 것은 1923년 한 피고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후 회의(懷疑)에 빠졌기 때문이다. 사형선고를 받은 피고인이 독립군이었다는 말도 전해져 온다.
그래 더욱 심한 고뇌에 빠진 그는 시장을 배회하다 지나가던 엿장수를 발견한다. 군데군데 헤진 곳을 꿰맨 누더기 옷을 입은 채 가위를 흔들고 있는 사내. 이찬형은 이 사내에게 말쑥한 양복을 벗어 주고 엿판을 인수했다. 그는 3년 동안이나 엿장수로 전국을 떠돌며 유랑 걸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눈 밝은 노스님이 그를 불러 세웠다. “행색이 엿장수지, 엿장수는 아니지요?” 출가(出家)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서른여덟 살, 적지 않은 나이에 그는 세속을 떠났다. 그런 만큼 수행은 치열했다. 엉덩이에서 진물이 흘러도 일어나지 않을 정도의 지독한 수행이었다. 그래서 ‘절구통 수좌’로 불렸던 효봉 스님은 금강산 토굴에 스스로를 유폐하고 1년 6개월 만에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그는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 스님과 고은 시인의 스승이기도 하다.)
오늘, 효봉 스님의 일화를 이리 적어 본 것은 헌법재판소장으로 지명된 김이수(64) 재판관의 과거 판결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어느 시민군에게 내린 사형 판결이 또다시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사연은 이랬다. 그해 5월, 버스 운전사였던 배 모(34) 씨는 시민군을 태우고 이동하다 경찰 저지선을 들이받았다. 이 사고로 경찰관 네 명이 숨졌다. 당시 이 운전사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1심 재판관이 바로 군 법무관으로 복무한 지 10개월쯤 된 27세의 김 후보자(당시 중위)였다. 세월이 흐른 뒤 배 씨는 재심 끝에 무죄가 확정됐다.
이에 대해 김 후보자는 엊그제 청문회에서 “당시의 경험은 평생 괴로움으로 남았다”며 사과했다. 아마 그 또한 ‘엿장수 판사’ 효봉 스님처럼 참회하고 있을 것이다. 피해자의 한 축인 5·18 단체들도 ‘실정법이 지닌 한계를 넘기 어려웠던’ 이 판결’을 이해하고 용서했다. 백발이 된 배 씨 또한 어제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 김 후보자와 악수를 나누며 용서의 뜻을 밝혔다.

김이수 재판관의 평생 멍에

한데 참으로 기막힌 일은 전혀 그럴 자격이 없어 보이는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김 후보자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두환 군부에 협조했기 때문에 헌재소장 자격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일 텐데 그 군부야말로 자신들이 속해 있는 한국당의 뿌리(민정당) 아니었던가. 전라도말로 하자면 참 ‘얼척없는’ 일이라 하겠다.
김 후보자는 전북 출신이지만 중고등학교는 광주에서 다녔다.(광주서중·전남고) 장인은 고(故) 정규오 광주중앙교회 목사이며 부인은 이화여대 학생운동 1세대인 것으로 전해진다. 부인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김 후보자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판결을 많이 내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보수층에서는 그가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에서 홀로 반대 의견을 냈다는 점을 들어 색깔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통진당 해산에 반대한 게 아니다. 단지 ‘특정 개인의 책임을 조직 전체에 전가하는 것이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는 해석을 제시했을 뿐이다. 따라서 나는 다른 특별한 일이 불거지지 않는 한 김 후보자가 무사히 청문 과정을 통과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나저나 새 정부가 출범한 지도 벌써 한 달이 됐는데 아직도 빈자리가 수두룩하다. 장관 자리도 미처 다 채우지 못하고 있으니 큰일이다. 애써 쓸 만한 사람을 찾아내도 곧장 갖가지 흠결이 드러나고 만다. 산 좋고 물 좋기 어려운 것처럼 도덕과 능력을 두루 갖춘 인물은 썩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니 이제 도덕성 검증에서 드러난 흠결을 어느 정도까지 용인해도 될 것인지,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본다. ‘엿장수 엿가락 자르듯’ 이럴 땐 이렇게 했다가 저럴 땐 저렇게 하면,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말이 결코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정권이 바뀔 때마다 ‘너희도 한번 당해 봐라’는 식의 ‘발목 잡기’만 언제까지고 계속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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