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인이 말했습니다. 가을은 을(乙)의 계절이라고.

“내 앞을 낙엽 한 잎이/ 바람에 불려 갑니다/ 방랑과 청춘과 사랑도/ 때가 있고 끝이 있습니다// 나뭇잎은 궤도도 없어/ 바람결만 따라서 헤맵니다/ 숲 속이나 늪 속에 비로소 멈춥니다”(헤르만 헤세 ‘불려가는 나뭇잎’)

이 같은 구절이 가슴을 칠 때 시인은 “가을을 타고 가을을 앓는다”고 했습니다. 궤도를 이탈한 채 아니, 궤도도 없이 이리저리 불려 다니다가 ‘숲’ 아니면 ‘늪’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추풍낙엽의 암시에서 을들의 삶을 유추해 내고는 곧바로 시인은 올가을엔 을의 자리에서 마음의 무릎을 꿇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우리 을들의 낮은 삶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 합니다. 시인의 눈빛이 따스하게 다가옵니다. 시인이란 바로 그런 존재인가 봅니다. 쓰라린 상처에 바르는 연고와도 같은….

올여름 살인적인 폭염으로 온 국민들이 잠 못 드는 밤을 보내고 있을 때 청와대에서 열린 새 여당 지도부와 대통령과의 오찬 회동의 초호화판 메뉴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송로버섯, 샥스핀 찜, 캐비어 샐러드, 바닷가재, 능성어, 한우갈비 등이 메뉴였다고 하더군요. 우리 서민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음식 이름들입니다.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는 이 음식을 먹으면서 가정용 전기료 몇 푼을 깎아주는 문제를 논의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즈음 모 장관의 청문회에서는 그의 천문학적인 씀씀이가 도마에 올랐습니다. 비정규직 청년의 2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을 단 한 달에 써버리는 엄청난 소비력을 과시해 놀라게 했습니다.

그렇네요.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서 어느 곳에서는 배불러 죽겠다고 웃고 떠들고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세상 후미진 어느 구석에서는 배가 고파 죽겠다고 숨죽여가며 흐느껴 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배부른 사람들은 배고픈 을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그저 그들이 무능력해서 그렇다고 치부해버리고 맙니다.

세상은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사람들은 갈수록 단단해져만 갑니다. 모든 분야에서 경쟁은 “너 죽고 나 살자” 식으로 양극단으로 치닫고 운동장은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만 갑니다. 경쟁에서 밀려난 상처 입은 마이너들의 종착역은 진정 ‘늪’ 뿐일까요.

아프고도 힘든 청춘들의 분노, 가계부채와 자녀 교육비에 등이 휘는 중년들의 신음소리, 구조조정이다 명퇴다 떠밀려 내동댕이쳐지는 장년의 허망한 눈빛들, 노후준비가 안되어 불안한 노년들의 남루한 옷자락, 세계 11위 경제대국인 대한민국 우리 사회의 서글픈 자화상입니다. 누가 이들에게서 희망이라는 힘을 앗아가 버렸을까요.

얼마 전 인터넷에서는 한 청년의 글이 을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른바 ‘흙수저 자성론’이라는 글입니다.

“나는 흙수저란 말이 싫다. 부모님이 그 단어를 알게 될까 봐 죄송하다. 나는 부모님에게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좋은 흙을 받았다. 그래서 감사하다”는 청년의 마음이 애틋합니다.

그리고 여기 또 한 사람, 삶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자식에게 우는 모습 들킬까 봐 이불 뒤집어쓰고 숨죽여 우는 한 애비가 있습니다.

“아르바이트 끝나고 새벽에 들어오는 아이의/ 추운 발소리를 듣는 애비는/ 잠결에 귀로 운다”(김주대의 ‘부녀’)

가슴이 먹먹 해지는 장면입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이 가을, 불안하게 가로수길을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이 시대 수많은 을들이여 그래도 길은 을들이 만들었고 그길은 역사가 되었음을, 인간 본래됨의 근원을 잃지 않는 따스한 가슴들이 있음을 믿읍시다. 그리고 오늘같이 가을바람이 스산한 날에는 세상 잡사 다 잊고 시장에 가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따뜻한 국수나 한 그릇 하면서 동병상련의 정이나 느껴보시지요.

신경림 시인은 말했습니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