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모내기철에 바랑을 짊어진 한 스님이 어느 마을로 들어섰다. 이 마을은 고려 17대 인종왕비인 공예태후가 탄생한 관산읍의 한적한 마을로, 보살피는 후손 하나 없는 무연고 묘가 자연으로 돌아간 한 세도가의 애환으로 남아 이 마을에 구비 전승되어 오고 있다.

마을로 들어선 스님은 당시 최씨 집 안마당으로 들어가 시주를 바라며 염불을 했다. 그때 주인은 스님이 짊어지고 있던 바랑에 모타래를 넣어주며 “일손이 부족하니 모를 나르는 모쟁이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는 바쁜 농사철이라서 그러하였으려니….” 스님은 어리석은 중생을 나무라지 못한 채 동네를 빠져나왔다.

몇 년 후 스님이 다시 그 집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최씨 집 근처에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인 그들 선조의 묘가 눈에 들어왔다. 집안으로 들어가 “밥은 있는데 인물이 없구나. 어허! 낭패로고”라면서 목탁을 두드렸다. “스님! 그 말뜻이 도대체 무엇이요?” “방금 이 댁의 선조로 보이는 묘소 앞을 지나쳐 왔는데 냇물이 묘와 너무 가까이 있어 후손들의 출세 길에 지장이 있어 보였습니다. 나무관세음 보살”이라고 했다.

최씨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그 비책을 물었다. “선조의 묘가 갈마음수형이니 묘 옆으로 흐르는 냇물의 물길을 되도록 멀리 돌리면 금생은 물론 후생에도 대단한 복을 받아 장차 후손들은 큰 명성을 얻게 될 것”이라 일러주고는 유유히 마을을 빠져나갔다. 갈마음수형 묘자리라면 ‘목 마른 말이 물을 먹는 형국’으로 자손들은 부귀하고 크게 흥할 자리다. 그런데 말이 물을 마시려면 최씨 선조의 묘와 냇물은 더욱 가까이 있어야 함에도 오히려 물길을 멀리 돌려 흐르게 해버렸으니 그 이후 최씨의 세도는 차츰 기울어 오늘날 단 한 가구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1992년 미국 LA 흑인폭동 때 화를 면한 한국인주유소가 있었다. 주변 주유소들이 화마에 휩싸여 온 도시가 생지옥의 나락에서 떨고 있을 때 “여기는 안돼! 오랫동안 나에게 도움을 준 내 아저씨 주유소”라고 하면서 한국인 사장의 보살핌을 받았던 한 흑인 청년이 목숨을 걸고 이틀 밤을 지켜낸 사투의 결과였다.

그뿐인가? 구례군 소재 운조루(雲鳥樓)라는 고택은 한국전쟁에서 좌우익 대립 때도 화를 면했다. 누구라도 열 수 있다는 타인능해(他人能解)란 글귀가 새겨진 쌀뒤주 덕분이었다.

굶는 자들이 쌀을 가져가도록 한 운조루의 배려는 “집주변 백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며 주변에 사람들이 끊이지 않게 하고 항상 후하게 대접하라.”는 경주 최부자집의 자손대대로 내려오는 3백년 부(富)의 비밀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리라.

내 집에 오는 사람에게 기쁨을 선사하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만나는 사람을 통해 복을 받는다. 만나는 사람 모두가 내게 복을 주러 왔다고 생각한다면 피하고 싶고 목소리 높여 큰 소리치는 사람일수록 더욱 더 친절하게 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 사무실을 찾아온 민원인에게 눈 마주치면 인사하고 자리부터 권하며 차 한 잔이라도 대접하라”고 당부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공자님도 덕이 있는 자는 외롭지 않아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