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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 ‘古都’ 중국 쑤저우] 하늘엔 천당·땅엔 쑤저우 … 중국인의 로망 ‘동양의 베니스’

2015. 11.12. 00:00:00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정원인 사자림.

중국 절강성 쑤저우는 마천루가 즐비한 상해와 문화적으로 대척점에 있는 도시다. 상해가 150년 역사를 헤아리는 도시로 유럽식 건물과 고층 빌딩으로 둘러싸인 신도심이라면 쑤저우는 2500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고도(古都)다. 상하이에서 버스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쑤저우는 초입부터 역사가 깊은 도시라는 것을 알려주듯 고색창연한 옛 건물들이 즐비하다. 현지인들은 중국에서 역사가 깊은 도시를 구별하는 법을 들려준다. “탑이 많은 곳은 틀림없이 오래된 도시”라는 것이다.
쑤저우에 자리한 아담한 사찰인 한산사(寒山寺)는 중국 교과서에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 절이다. 1500년 역사가 암시하듯 절이 고색창연한 점도 눈길을 끌지만 관광객들의 발길을 붙잡는 이유는 따로 있다. 유명한 시(詩) 때문이다.
당나라 때 쑤저우에 살았던 장계(張繼)라는 시인이 지은 풍교야박(楓橋夜泊)이라는 7언율시다. 풍교(楓橋)는 한산사 주변을 흐르는 운하에 놓인 다리. 시구에 한산사가 등장한다. 중국 중학교 교과서는 물론 일본의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풍교야박이 실려 있다. 일본 관광객들이 이런 이유 때문에 한산사를 찾는다고 현지인들은 귀띔한다. 한산사에 세워져 있는 시비(詩碑)는 사진촬영의 명소다.
시비에는 월락오제상만천(月落烏啼霜滿天·달 지고 까마귀 소리 들릴 제, 찬 서리 하늘에 가득) /강풍어화대수면(江楓漁火對愁眠·강교와 풍교에 댄 어선이 마주보며 시름에 겨워 졸고 있네) /고소성외한산사(姑蘇城外寒山寺·고소성 밖 한산사) /야반종성도객선(夜半鐘聲到客船·한밤중을 알리는 종소리 객선까지 들리누나.)
이 시는 장계가 과거에 무려 3차례나 낙방해 귀향하면서 탄생했다. 금의환향을 꿈꿨던 선비의 내면과 풍경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시다.
한산사는 중국에서 4대 사찰로 꼽은 절이다. 인도에서 스님이 백마의 등에 불경을 싣고와 지었다는 백마사가 첫손 꼽히고 쿵푸로 유명한 소림사, 인도의 해리스님이 세운 영은사, 마지막으로 한산사가 포함된다. 4대 사찰은 오랜 역사를 순서대로 꼽은 절이다.
한산사는 한산(寒山)이라는 스님 때문에 사찰의 이름을 바꾼 경우다. 절의 이름과 관련해 재미있는 고사가 전해진다. 당나라 때 한산이라는 백정이 있었다. 동생은 습득(拾得)으로 형제애는 소문이 자자했다. 어느날 형 한산이 마을 규수와 선의 보게됐다. 그러나 운명은 얄궂다. 결혼을 하루 앞둔 어느 날 한산이 이웃 마을에 돼지를 잡으러 갔던 중 잊어버린 물건을 찾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자신과 결혼할 여인이 동생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게 아닌가. 둘의 대화를 엿듣던 한산은 큰 충격을 받는다. 규수는 동생의 소매를 부여잡고 “내가 사모해온 당신을 두고 당신의 형과 결혼하는 처지가 너무 슬프다”는 내용이었다. 습벽은 “우리형은 좋은 사람이오. 결혼해서 행복하시오”라고 말끝을 흐렸다.
이 대화를 엿들은 한산은 나 때문에 아름다운 사랑이 깨지게 됐다며 그 길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다. 그의 이름을 따 한산사가 됐다. 결혼을 앞두고 종적을 감춘 형을 찾던 습벽은 전후사정을 알고 자신도 불가에 입문한다.
이런 고사 때문에 신혼부부들은 한산사에서 향을 태우며 변치않는 사랑을 약속한다.
쑤저우는 중국사를 알고 보면 더 음미할 볼 거리가 많은 곳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와신상담’(臥薪嘗膽)과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유래인 오(吳)나라의 도성이었던 곳이다.
BC 496년 오(吳)나라의 왕 합려(闔閭)는 월(越)나라로 쳐들어갔다가 월왕 구천(勾踐)에게 패한다.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절명한 합려는 아들 부차(夫差)에게 원수를 갚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부차는 가시가 많은 장작 위에 자리를 펴고 자며, 방 앞에 사람을 세워 두고 출입할 때마다 절치부심했다. 부차가 이를 갈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월나라 왕 구천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오나라를 먼저 쳐들어갔으나 대패했다. 구천은 얼마 남지 않은 군사를 거느리고 회계산(會稽山)에서 버텼으나 결국 포로가 됐다. 구천과 신하 범려는 3년 동안 부차의 노복으로 일하는 등 갖은 고역과 모욕을 겪었고 구천의 아내는 부차의 첩이 되었다. 그리고 월나라가 영원히 오나라의 속국이 될 것을 맹세하고 목숨만 겨우 건져 귀국했다.
그는 돌아오자 잠자리 옆에 항상 쓸개를 매달아 놓고 앉거나 눕거나 늘 이 쓸개를 핥아 쓴맛을 되씹으며 자신을 채찍질하였다. 이후 오나라 부차가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북벌에만 신경을 쏟는 사이 구천은 오나라를 정복하고 부차를 생포하여 자살하게 했다. 치욕을 겪은 지 20년 후의 일이다.
오월동주는 손자(孫子) ‘구지편’(九地篇)에 나오는 손자의 말로 “대저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은 서로 미워한다. 그러나 그들이 같은 배를 타고 가다가 바람을 만나게 되면 서로 돕기를 좌우의 손이 함께 협력하듯이 한다(夫吳人與越人相惡也 當其同舟而濟遇風 其相救也 加左右手)”라고 한 데서 비롯됐다. 즉, 서로 원수지간이면서도 어떤 목적을 위하여는 협력하는 사이를 말한다.
중국 국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거리도 쑤저우에 있다. 삼당가(三塘街)는 3.6㎞에 달하며 1179년 역사를 간직한 옛 건물들이 운하를 끼고 배열돼 있다. 각종 민예품과 의류, 비단 등 아기자기한 볼 거리들이 많아 관광 명소가 됐다. 운하를 끼고 있는 거리도 운하로 비단을 실어날랐던 옛 영화를 말해주듯 크고 작은 운하 3000여개가 쑤저우에 있다고 한다.
옛 중국인들의 소원 가운데 하나는 쑤저우에서 태어났으면 하는 것이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날 가능성이 클 정도로 부자들이 많은 곳이어서다. 대표적인 정원인 사자림을 비롯해 왕들의 정원을 능가하는 빼어난 정원이 무려 68곳이나 쑤저우에 있다. 비단생산으로 번성했던 도시였기 때문에 부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쑤저우에 정원이 많은 이유는 부자들이 이 곳을 적지로 택했기 때문이다. 옛 부자들은 황제가 있는 도성을 피해 쑤저우 등 양쯔가 이남에 별장인 정원을 지었다고 한다. 빼어난 정원이 황제가 머무는 곳과 가까우면 빼앗길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양자강 아래 쪽 강남인 쑤저우와 항저우에 정원이 많은 이유다.
쑤저우 정원을 대표하는 사자림은 원나라 말기 원목대사를 기리는 공간이다. 무려 1000명에 달했던 제자를 두었던 원목의 제자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스승을 위해 지은 공간이 사자림이다. 원목대사는 이 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명대에 훼손됐으나 청나라 때 쑤저우의 거부가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사자림이 유명해진 것은 중국 황제 강희제(康熙帝) 때문이다. 그가 원림구경을 나섰다가 길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강에서 건져올린 기암괴석으로 꾸며진 사자림은 연못과 나무 등 조경이 빼어나다. 사자를 닮은 괴석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쑤저우=윤영기기자 penfoot@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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